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숱하게 차별받아온 동현(황이든)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부모의 고향인 한국이 궁금하다. 엄마 소영(최승윤)은 좀처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동현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퍼시 잭슨과 괴물의 바다> <에반젤린> 등에 출연한 배우 겸 감독 앤서니 심은 자신의 경험을 담아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연출했다. 1990년 캐나다를 배경으로 이민 1, 2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상, 제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토론토 플랫폼상을 포함해 27관왕에 올랐다.
-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계기가 있나.
= 배우 활동을 먼저 시작했는데, 캐나다에서 한인 캐릭터의 오디션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한국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적었고 역할이 주어진다 해도 특성이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불평만 할 바엔 직접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실험적으로 작업한 전작 <도터>를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터라 가능한 결정이었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마지막 연출작이 될 수 있으니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에 나의 기억과 취향을 작품에 많이 녹여냈다.
- 동현만큼이나 소영의 비중이 큰데 시나리오를 쓸 때 어머니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나.
= 코로나19 팬데믹 때 집에 머물면서 자연스레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때 엄마가 자신의 과거에 관해 많이 들려주셨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눈 게 처음이었다. 한번은 판소리 영상을 보여주셨는데 너무 감명 깊어 이게 무슨 스토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려장 우화를 들려주시더라. 자식에게 버림받는 순간까지 아들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는 어머니에 관해 들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소영이 동현과 산에 오르는 신을 미리 구상해뒀는데, 같은 상황은 아닐지라도 고려장 우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시나리오에 반영했고 동현의 영화에서 소영과 동현의 영화로 구체화됐다.
- 소영과 동현이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 과정을 들려주며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 내레이션의 주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동현의 아버지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우릴 지켜보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게 작품에도 반영이 된 것 같다. 촬영감독도 시나리오가 소영과 동현이 아닌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 그럼 촬영 자체도 아버지의 시선이라 가정하고 해보면 어떨까 싶어 그렇게 진행했다.
- 확실히 촬영에서 그런 의도가 감지됐다. 롱테이크가 많고 멀리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며 인물들을 살피는데, 인격이 부여된 움직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 영화의 감정선이 센 편인데, 거기에 주인공의 시선까지 가미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과하게 몰입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람했으면 싶은데 거리를 두면 자칫 영화가 너무 차가워 보일까봐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시선이라 가정한 것도 있다. 아버지라면 소영, 동현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싶어 할까, 그런 점들을 고려해 촬영감독과 카메라의 위치를 정했다.
- 감정 표현이 중요해 배우 캐스팅에도 주의를 기울였을 것 같다.
= 어린 동현을 연기한 황도현 배우는 오디션 영상이 너무 좋았고, 청소년 동현 역의 황이든 배우는 사진을 보자마자 느낌이 와서 바로 캐스팅했다. 소영 역의 배우를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이민 1세대의 느낌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이미지의 배우가 흔치 않더라. 그러다 한국의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최승윤 배우를 추천받았다. 교장 선생님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연기해 보내줬는데 내가 각본에서 의도한 바를 정확히 살려줬다. 영화 경험이 없던 배우라 고민이 됐지만,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결국 소영 역에 캐스팅했다.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줘서 정말 감사하다.
- 소영의 상대역인 사이먼을 직접 연기했다. 한 작품의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 정말 어려웠다. 게다가 16mm 필름으로 촬영해서 촬영분을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배우로만 참여했다면 연출자의 지도를 따르면 됐을 텐데 그 지도를 내리는 게 나였으니까. (웃음) 프로듀서와 다른 제작진들과 의견을 나누며 다시 찍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연출도 연기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불안과 미안함이 마음 한쪽에 계속 자리했다.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 소영이 동현과 함께 한국에 있는 남편 가족을 방문하는 신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 한국 시골의 풍경을 어색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로케이션 섭외나 캐스팅에도 신경을 썼다. 한국어 대사가 자연스럽게 표현돼야 했는데 다행히 배우들이 뉘앙스 등을 조율하는 데 도움을 줬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신을 가장 좋아한다. 단순한 장면이지만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고, 동현 역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변화가 잘 표현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애정이 많이 간다.
- 극 중 인물들은 주로 식사를 하며 중요한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동현이 처음 차별을 인지하는 순간도 친구들이 자신이 먹는 밥이 낯설고 이상하다고 놀릴 때다.
= 실제로 어릴 때 한국 음식을 먹다 괴롭힘을 많이 받았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고 놀림받는다는 게 아이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지 얘기하고 싶었다. 식사 장면은 사실 처음엔 인지하지 못하고 썼다. 그러다 생각해봤는데, 사람들이 뭘 먹을 때 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 같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지 않나. 승윤씨가 ‘식구’(食口)의 의미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줬는데 그 단어가 이 영화를 잘 대변해준다고 느꼈다.
- 제목을 <라이스보이 슬립스>라고 지은 이유는= 글을 쓸 때 작품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 듣곤 하는데 이번엔 욘시 & 알렉스(Jónsi & Alex)의 《Riceboy Sleeps》라는 앨범을 자주 들었다. 사실 작품에선 ‘라이스보이’가 동현을 차별하는 단어로 쓰인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방문해보니 동현의 할아버지는 논밭을 일구는 분이었고 동현의 아버지도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자랐다. 쌀 자체가 한국인에게 중요한 식재료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의미가 잘 맞닿는다고 생각해 앨범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최근 앨범을 다시 들어봤는데 역시 영화의 톤과 잘 어우러지더라.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보고 기회가 된다면 동명의 이 앨범도 들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