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인의 데구루루]
[김세인의 데구루루] 나무 밑
2023-05-04
글 : 김세인 (영화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연출)

지난해 10월, 한 영화에서 연출팀으로 일을 했다. 그날의 촬영지는 모델하우스였는데 현장에 들어서자 이미 촬영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서둘러 배우와 가장 가까우면서 화면에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모니터를 설치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간 길을 지날 때마다 티슈, 행주 등을 봉투에 담아 다가오는 모델하우스 직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저는 돈이 없어요’ , ‘제 통장에 든 액수는 고작 000원뿐이에요’를 속으로 되뇌며 돌아가곤 했다. 때문에 모델하우스 안에 들어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이 진입하는 생의 챕터에 대한 낯섦, 설렘과 긴장을 안고 이 공간에 발을 디뎠을 방문자들, 그런 마음을 품었을 영화 속 인물, 그 인물을 꿈꿨을 감독, 장면을 꿈꿨을 스탭들. 여러 사람의 조용하고 분주한 발걸음들이 겹쳐 보였다. 촬영 현장의 오묘한 분위기가 모델하우스라는 공간과 어울렸다.

거대한 아파트 모형 앞에 서보았다. 생각보다 꽤나 정교한 모양이었다. 집들마다 같은 색과 양으로 빛이 났다. 간판이며 도로에도 색색의 조명이 번쩍이고 있었다. 인공조명뿐 아니라 태양빛 또한 구현되어 있어 사람 인형과 나무 모형에 그림자가 달렸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오후 12시의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길에 서 있는 사람 인형은 둘 혹은 셋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구도였다. 아파트 곁을 사람들의 활기로 꾸미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활기 속에 어쩐지 한 사람만이 홀로 서 있었다. 나무 밑 그늘 아래 손을 모으고 있는 다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그 사람은 한낮의 맹렬한 열기를 피하고 있었던 걸까.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 자태가 매우 고요해 보였다. 설계자의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아파트 모형의 생생함은 이 작은 한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팔을 펼치고, 팔짱을 끼고, 손을 주머니에 넣고 허리를 꺾어 하늘을 보며 대화하는 사람 인형들은 강한 조명 아래서 모두 한없이 인위적으로 보였다. 우뚝 서 있는 그 여자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잔잔하고도 깊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주 작고 깊은 숨.

*

특정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에 나는 작은 회사에 다녔는데 점심 때마다 회사 앞의 오래된 맨션으로 가 건조대에 걸려 있는 빨래를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보통 수건이나 아이의 내복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때로는 지하철 앞 나무 밑 그늘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한낮의 맹렬한 열기를 피하고 있었고, 뭔가를 기다리고도 있었다. 그 뭔가는 아주 먼 것이어서 나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끔 나는 내가 그 뭔가의 눈으로 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먼 곳에서 내가 나를 보는 기분. 여기 내가 있고, 또 저 멀리 내가 있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들면 숨이 차지 않았다. 코끝에 닿을 것 같던 어떠한 영역이 나와 다른 나의 마주침 혹은 알아차림의 순간에 넓고 넓어져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러한 기분은 글을 쓸 때도 가끔 느낀다. 글 안의 인물과 글 밖의 내가 눈을 마주치거나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감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인물의 눈앞에 놓인 상황, 물건, 사람을 아주 가깝고도 멀게 바라본다. 이러한 두개의 응시 사이에서 나는 뛰면서 앉아 있을 수 있고 앉아 있으면서 뛸 수 있고 작고도 거대해지고 거대하면서 작아질 수 있다. 여러 상태가 되는 자유다. 여기의 눈동자와 저기의 눈동자를 잇는 하나의 선이 휙- 그어지고 그 선을 따라 세계가 쩍- 갈라지는 기분.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무섭고 아무리 아린 장면이라도 마냥 시원하고 상쾌하다. 쩍- 갈라져 입 벌리고 있는 세계 안에서 가볍고 산뜻하게 활강한다. 글을 쓰고 본다는 것은 나와 내 주변의 코앞의 영역을 멀찍이 밀어주는 것. 조금 더 깊게 숨 쉬고 조금 더 편안히 몸을 움직여볼 수 있게 하는 것. 밀어진 영역의 양만큼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빚졌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빚졌다. 그래서 계속 써야만 한다. 그런 기분이다.

*

얼마 전 나무 밑에서 기체조를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순간 기체조에 반해버렸고 해당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동안 기체조를 하며 지내는 계획을 세웠으나 충격적인 집세를 확인하고 단숨에 포기해버렸다. 기체조야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 지역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은 갖가지 종류의 나무와 풀, 꽃들이 잘리지 않은 채 길과 공원에 생장해 있었다. 어떠한 절단도 없이 무한하게 제 몫만큼 뻗어 있는 나무 밑에서 기체조를 하고 싶었다. 나의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구체적인 육체를 가졌는지 계속적으로 확인하며, 느끼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가끔 허황된 사람이라 딛고 서 있는 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금세 꼬꾸라지고 만다. 그래서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몸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두손을 크게 움직여 글쓰기를 가로막는 목소리들을 휘휘 흩뜨려트려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글을 쓰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기대해본다. 그렇게 몸과 글을 굴리면서 더 넓고 넓어지는 것을 기체조를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며 짧은 시간 꿈꿔보았다.

이렇게 글을 쓸 때의 개인적 기분에 대해 두장 가까이 떠드는 것이 다소 낯간지럽지만 한번쯤은 써보고 싶었다. 이런 기분을 믿지 않으면 쓸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에세이 연재를 시작하며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서둘러 써보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쓸 때의 기분도 듣고 싶다. 그에게는 얼마나 신나고 신비로운 경험일지 말이다. 나는 그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면 쓰고 싶어진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는 다른 작가의 글 쓰는 경험이나 루틴에 대해 찾아보곤 한다. 누군가가 이 에세이를 읽고 조금이라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날이 더워졌으니 다시 따릉이를 타야겠다. 산에 올라 기체조도 해야겠다. 깊은 곳으로 걷다보면 분명 마음에 드는 나무를 발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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