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시리즈 부문 올해의 여자배우로 “<졸업>의 히로인”(조현나) 정려원이 선정됐다. 대치동 스타 강사 서혜진으로 분한 그는 “험악한 상황을 경험하고도 강의실 문을 열 때는 한껏 미소 짓는 ‘프로’의 얼굴과 고단한 30대 여성 직장인의 얼굴”(오수경)을 고루 보여주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작품의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그 지점을 향해 넓게 움직이며 달려”(복길)가는 배우임을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증명해냈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자세로 연기” (김현수)했기 때문에 <졸업>은 “자기 캐릭터를 온몸으로 통과해낸 ‘인간 정려원’의 순도 높은 사랑과 숙련된 베테랑 ‘배우 정려원’의 밀도 높은 테크닉이 만들어낸 눈부신 랑데부”(진명현)를 목격할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기쁜 소식을 전하며 정려원에게 <졸업>의 명장면에 대해 세세히 물었다. 일찍이 <졸업>을 자신의 분기점이라고 말해왔던 그는 여전히 현장의 순간과 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풀어낼 줄 알았다.
- ‘올해의 여자배우’ 선정에 앞서 제29회 소비자의 날 KCA 문화연예 시상식에선 시청자가 뽑은 올해의 배우상을, 제15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에선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졸업>의 꽃다발을 여러 차례 받고 있는 올해를 돌아본다면.
열심히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 한해였다. 올해 초 <졸업> 촬영을 끝냈다. 활자가 가득한 대본을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건 나니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최선을 다했다. 연말에 찾아온 수상 결과가 많은 분이 우리 드라마를 좋아해주시고 기억해주신다는 의미 같아서 위안이 되고 감사하다.
- <졸업>의 뛰어난 장면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혹시 ‘신명이 난다’를 아직 기억하나.
물론이다. (웃음)
- 1화에서 혜진은 ‘신명이 난다’의 표현법을 찾는 찬영고 국어 시험에서 기존 역설법뿐만 아니라 반어법까지 정답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기 위해 표상섭(김송일) 선생님을 찾아간다. 바랐던 ‘건전한 토의’는 어그러지고 교무실 밖을 나온 혜진은 벽을 짚고 걸어야 할 만큼 기진맥진한다. 서혜진이라는 인물의 강한 면과 약한 면을 초장에 한 에피소드로 보여준 명장면이었다.
원래는 ‘신명이 난다’가 아니었다. 찍기 2주 전쯤 의견이 반반으로 확실히 가릴 수 있는 문제여야 한다는 판단 아래 ‘신명이 난다’로 바뀐 거였다. 입에 이미 붙은 대사를 버리고 새로 외우느라 고생을 좀 했다. 이 신은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내가 잘해야 하는 신이라는 걸 직감했다. 결판이 나는 승부처랄까. 잔잔하게 흘러가는 우리 드라마에서 시청자를 잡아둘 수 있는 지점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판석 감독님이 워낙 자연스러운 걸 추구하시는 분이라 퍼포먼스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시청자와 연출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연기란 무엇일지 고민이 깊었다.
- 후반부에서 혜진은 학원강사가 된 상섭과 재회한다. 상섭의 무료 강의를 맨 뒷자리에 앉아 지켜보는 혜진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떠다니는 듯했다.
사실 촬영 순서상 이 신이 있는 12화를 먼저 찍고 앞서 말한 교무실 신이 있는 1화를 찍었다. 아마 강의 신이 김송일 배우의 첫 신이었을 텐데 보면서 압도됐었다. 존재 자체가 선생님인 저분과 연기하려면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집에 가서 연습하고 싶었다. 이렇게 긴 강의 신을 포함해 <졸업>의 거의 모든 신은 한번에 쭉 갔다. 감독님이 신 안에 담긴 공기가 바뀌는 걸 원치 않으셨다. 후시녹음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배우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 모두가 초집중 상태로 임했다.
- 시우 학생(차강윤)에게 박완서 작가의 <카메라와 워커>를 가르치는 일대일 무료 강의 장면은 혜진에게 가르치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안겨준 중요한 신이다. 다시금 보면서 혜진이 한강 작가의 작품은 어떻게 설명했을지를 생각했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으셨다는 소식에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라면 학생들에게 작가님의 작품을 먼저 읽어오라고 한 뒤 한 문장, 한 챕터씩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시간을 만들었을 것 같다. 이 신은 새벽 4시쯤 찍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시간대였는데 앞에서 차강윤 배우가 수업을 경청하는 모범생의 눈빛으로 날 바라봐준 덕에 몰입할 수 있었다. 혜진이 처음으로 그 큰 강당에서 마이크 없이 강의하는 신이라 느낌이 남다르기도 했다.
- 학원을 함께 키워온 혜진과 김현탁 원장(김종태)과의 관계에 관해 얘기할 기회는 비교적 적었을 것 같다. 6화 옛 단골 식당 신에서 혜진은 신뢰를 깨뜨린 원장에게 “사과는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죠”라며 화를 낸다. 늘 일정 속도를 달리는 혜진이 이렇게 돌진할 때마다 캐릭터의 매력이 배가됐다.
이 신이 긴 대사 전문인 혜진의 시작점이었다. 이 신을 찍으면서 편안해졌다. ‘나, 할 수 있구나, 한번에 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안 감독님 촬영장의 장점이기도 한데 자꾸 내 모습이 나오는 거다. “사과는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죠!”라고 내뱉는데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감정형 정려원이 섞여 들여가서 이게 혜진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 그런데 감독님이 “혜진과 원탁은 진짜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삿대질하면서 격앙된 채로 싸우는 게 맞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연기에 담아도 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에 확신을 얻고 용기를 냈다. 그래서 <졸업>은 본연의 내가 가장 많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 읽는 방법부터 가르치겠다는 준호(위하준)와 현실을 자각하라는 혜진의 11화 대치 장면은 이른바 ‘8분 롱테이크 싸움 신’으로 회자되는 <졸업>의 대표 장면이다. “언제까지 얘들 필기나 대신해줄 거냐”는 준호의 말은 혜진이 애써 외면하던 생각들이라 혜진에게 비수처럼 꽂혔을 것 같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 엿보이는 준호를 보면서 혜진이 일종의 거울 치료를 당하는 장면이다. 교육의 본질을 입에 올리는 준호가 처음에는 이상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을 가지고 곱씹다보면 준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사실 우리 모두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 이 신에서는 아무도 긴장을 하지 않았다. 옆구리를 찌르면 대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외워갔다. 위하준 배우가 철없는 멜로 남자주인공으로 보이는 것에 개의치 않고 핏대를 세워가며 연기해줬다. 덕분에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쯤에 “따라오면 죽어”라는 대사를 하는데 실제로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 마지막 화는 강의실에서 준호가 프러포즈를 하고 그걸 수락하는 혜진의 모습으로 끝난다. 실제로도 마지막 촬영이었을까. 어쩐지 많이 울었을 것 같다.
그다음 날 찍은, 15화에서 혜진이 준호에게 “이제 주세요. 빛나는 졸업장을”이라는 말을 듣는 신이 마지막이었다. 이날 너무 아쉬워서 울었다. 안 감독님이 진짜 빠르셔서 16부작을 4개월 반에 찍으셨다. 나는 이 따뜻한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웃음) 서혜진으로 사는 동안 인물이 단면적이지 않아서 참 좋았다. 감독님의 인물은 추잡한 모습까지 다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캐릭터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엔딩에서 누구보다 계획형인 혜진이 갑작스럽게 반지 케이스를 열어 보이는 준호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흘러가는 대로 또 따라가는 것이 혜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