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바다 마을에서 살아온 나영(권유리)의 낙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다. 점심이면 모두 모여 함께 끼니를 나누고 새로운 소식이 들리는 날이면 파티를 연다. 하지만 가족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길해연)는 정든 집을 팔자고 하고 동생(현우석)은 20살이 되면 서울로 독립을 할 거라 통보한다. 새로운 변화가 막연한 불안처럼 느껴지는 나영은 다시 예전처럼 변함없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사실 나영과 배우 권유리는 많이 다르다. 걸그룹 '소녀시대'로 데뷔하여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각도의 자기 확장을 거쳐온 그와 달리 나영은 단조로운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이 둘은 닮아있다. 온 힘을 다해 친 볼링공이 행운처럼 날아오를 때, 마치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돌핀처럼 솟아오를 때 그 순간과 자신을 연결 짓는 나영처럼 유리는 자신의 소중한 찰나를 부지런히 그러모은다. 나영과 유리 사이의 희미한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독립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 <돌핀>에 대한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독립 영화에 대한 관심은 늘 컸다. 평소에 워낙 즐겨 보기도 하고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졸업하며 주변 선후배 동기들의 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독립영화의 자유분방한 메시지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돌핀>의 ‘나영' 역을 제안받았을 때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길해연 선배님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 결심의 가장 큰 이유였다. 선배님의 오랜 팬이다.
- 나영은 변화를 불편해하고 현재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길 바라는 인물이다. 모든 가족이 변함 없이 한집에 같이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 그래서 처음엔 나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시나리오에 그의 태도에 관한 힌트가 담겨 있었다. 나영이 이 지역의 관광객으로 왔을 때 부모님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 부모님을 잃은 전사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원하고 주변인을 변함 없이 지키고 싶어 하는 면들이 이해됐다.
- 연기, 연극, 방송, 앨범 활동부터 해외 진출까지 새로운 경험에 익숙한 유리 배우에게 나영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 솔직히 말하면 시나리오를 보는데 너무 답답했다. (웃음) 나영과 친해져야 하는데 교집합 자체가 없고 나의 사고방식이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배두리 감독님을 붙잡고 왜 나영이 이런 선택을 하는지, 나영이 더 친절하게 나올 수는 없는지 등등 질문을 많이 했다. 감독님과의 대화를 기점으로 나영 캐릭터를 조금씩 납득했다. 그의 감정에 몰입이 되고 애틋함이 커지면서 다른 가족들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 지금까지 <폐점시간>(2009) <놀이>(2010) <어젯밤>(2012) 등 단편 영화를 주로 연출해 온 배두리 감독의 첫 장편을 함께 했다. 비슷한 나이대라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컸을 것 같다.
= 나영을 보다 보면 배두리 감독님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길해연 선배님도 “감독님이 나영이네!” 하셨다. (웃음) 실제로 감독님도 볼링 동호회를 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하셨다. 하루는 회식을 하면서 나의 어떤 모습이 나영과 어울려 보였는지 감독님께 물었다. 맨얼굴에 흰 티를 입고 만난 순간, 단단하고 묵직해 보이는 모습이 나영과 비슷해 보였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볼링은 나영이 받아들인 유일한 새로운 것이자 감정적 해소를 경험하는 창구다. 영화 중 볼링 촬영이 무척 많았는데.
= 볼링을 너무 못 친다. 어떤 방향으로 공을 굴리든 한쪽 도랑에 빠진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볼링을 배웠다. 다행히 극중 나영 캐릭터도 이제 막 볼링을 배운 시점이어서 선수처럼 잘할 필요가 없었다. 나영은 볼링을 잘 쳐서 혹은 스포츠를 즐기는 성격이어서 볼링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나 서운함을 볼링으로 풀어내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좋아한다. 영화에서 나영이 볼링과 교감하는 모습이 반복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 나영에게 볼링이 있다면 권유리에겐 무엇이 있을까.
= 너무 철학적인 질문인데. (웃음) 나영이가 볼링으로 감정 분출을 한다면, 나는 어떤 순간에 강렬하게 몰입했다 빠져나올 때 완전한 소강상태에 이른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콘서트 무대에 서거나, 연극을 할 때 그렇다. 나를 그 순간에 완전히 몰아넣고 다시 현실로 빠져나올 때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진다. 그런 일이 나의 직업인 게 너무 행복하다. 물론 그만큼 어렵다. 너무 소중하니까.
- 집 안에 머물고 싶은 나영과 외지인으로 부유하지만 안착하고 싶은 해수(심희섭)는 궁극적으로 같은 감정을 나눈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나.
= 나영과 해수는 연민, 공감, 위로, 처절함 등 너무 많은 감정이 뒤섞인 관계다. 처음에는 정의가 잘 되지 않았다. ‘둘이 썸이야, 뭐야!’ 하면서 헤매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적 시선으로 해석할 수 없다. 서로에게 비상구이자 환기가 되는 관계에 가깝다. 조금 거리를 갖고 바라보니 그제야 나영과 해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였다.
- 빠르게 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영의 면모는 수수한 옷차림새에도 드러난다.
= 시각 정보로 인물을 드러내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같은 옷 몇 벌을 다르게 변주해 코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워낙 오래된 것들에 애정이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실제 옷들을 많이 활용했다. 화룡점정은 시계다. 나영이는 엄마가 물려준 예물 시계를 잘 때까지도 빼지 않고 계속 지니고 있다. 사실 나영의 평소 스타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계다. 너무 오래되고 고급스럽다. 애착 인형처럼 붙어 지내다 어느덧 시계를 풀 때, 나영의 성장과 변화가 잘 드러난다.
- ‘퍼스널 브랜딩' ‘사이드 프로젝트' ‘갓생 트렌드’ 등 자기 계발을 대대적으로 강조하고 재촉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빠른 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돌핀>이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 이 질문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 같다. 더구나 SNS 전시로 인해 나와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변화 속도도 무척 빠르지만 중심이 나에게 없으니 더욱 불안해지고 힘들어진다. 나 또한 이런 점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나만의 방안을 하나 찾아냈다. 비교하고 싶다면 어제의 나하고만 비교하는 것이다. 나와 먼 타인과 비교하지도, 너무 막연한 미래 속의 나와 비교하지도 않는 게 중요하다. 사실 영화 초반의 나영과 엔딩의 나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아지고 있지만 하루만에 가시적인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모두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