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1일. 전날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한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끝내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새해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마음을 먹은 까닭은 2022년 12월31일에 완벽한 커피를 찾아 2만원짜리 게이샤 원두커피를 포함해 6잔을 때려 마셨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고, 하지만 이것이 7천원 정도라면 매우 훌륭한 커피라고 감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제3의 물결인가 뭔가가 커피 시장을 망쳤군’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즘은 카페에 가면 뭐라도 아는 척 원두를 골라야 하고, 차려입은 바리스타들은 취향에 맞는 커피를 골라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저 맛있는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을 뿐인데 거기서조차 멍청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니. 이런 커피 문화에 조금 지쳐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행동하는 것도 이제 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아직 끝내주는 커피를 맛보지 못한 까닭에 자꾸만 새로운 카페를 찾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신비한 원두를 찾아, 끝장나는 손놀림을 지닌 바리스타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분명 세상 어딘가에는 끝장나게 맛있는 커피 한잔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그 완벽한 한잔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는 커피다
“커피는 그냥 커피죠.” 커피를 좋아하는 다름씨가 한 말이다. 그는 서점에 올 때마다 <drift>만 읽는다. <drift>는 한 도시의 커피 문화를 여행하듯 천천히 소개하는 잡지인데 다름씨는 그 잡지를 읽고 나서 매번 그곳에 가본 것처럼 다른 도시의 바리스타는 무슨 마음으로 일을 하는지, 어떤 종류의 원두가 유행인지, 가볼 만한 카페는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 멜버른에서 추출이 잘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멕시코시티에서는 바리스타가 커피의 뉘앙스를 하나하나 소개해준대요. 그러던 어느 날 다름씨는 말통만 한 커피를 들고 찾아왔다. 아무 말 없이 거대한 커피를 바라보고 있자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커피가 그냥 커피지 뭐 별거 있나요, 라고 덧붙였다. 혹시 그는 커피 잡지를 읽으며 다양한 커피 맛의 세계를 탐험하다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는 석잔의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불면의 고통에 시달리지도 않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핫한 카페를 찾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말통만 한 커피는 다름씨의 삶을 구원했는지도 모른다. 커피와 예술을 사랑한 롤랑 바르트가 남긴 말처럼. “커피는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한다. 먼저 맛있는 커피를 찾으러 방황하는 동안, 둘째로 커피를 연거푸 마신 후. 결국 커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커피를 통해 우리는 지나치게 피곤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서울에 좀비가 출몰하는 영화가 탄생한다면 그들의 대피소는 백화점(<새벽의 저주>(2004))도 술집(<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도 아닌 카페일 것이다. 서울 시민들은 좀비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광경을 뒤로하고 바리스타가 내려준 드립 커피를 마시며 자신들의 할 일에 몰두할 것이다. 이제 카페는 일종의 대피소가 되었다.
카페가 대피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메타포다. 이 메타포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발자크는 다음과 같이 인간을 분류했다.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이것은 모든 유형의 삶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세개의 분류 방식이다. 서울의 카페는 이 모든 계층이 모이는 집합소다. 노동자도, 예술가도, 백수도 모두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일종의 피난민이다. 카페를 찾는 이에게 현실은 일종의 거대한 재난이다. 5평짜리 원룸, 전세자금 대출, 풀리지 않는 현실의 고민. 우리는 현재 망명할 곳이 필요하다. 정신, 육체, 경제,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해방된 공간. 카페는 커피값 한잔으로 그 환상을 충족시킨다. 두 번째는 ‘중첩된 공간’으로의 카페다. 이제 커피는 커피가 아니다. 커피는 모호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커피는 휴식인 동시에 노동이며 탈출인 동시에 몰입이다. 이제 일하는 인간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커피를 마시며 일하는 인간을 꿈꾸기도 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커피의 맛이나 신선한 원두 따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끝내주게 완벽한 커피가 아니라 끝장나게 빠른 와이파이 속도다.
커피는 커피가 아니다
사실 나는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12월 마지막날 다름씨와 완벽한 커피를 찾아 표류하며 커피를 6잔이나 시켜놓고 카페인에 취해 떠든 소리 중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이미 끝장났다는 말뿐이었다. “저는 도저히 나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다름씨는 이런 소리를 떠드는 나를 딱하게 생각했는지 커피값을 대신 내주었다.
“커피만 그렇게 마셔대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점심도 먹지 않고 커피만 들이켠다며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기에 차라리 커피를 마시다 죽어버리는 쪽이 더 낫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이미 세상은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다 죽는 건 호상 아닐까요?”
“세상은 좀더 좋아질 겁니다, 민성씨. 물론 아직 많은 사람이 힘들 때지만 잘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조금씩 더 좋아질 겁니다. 제가 커피를 찾아 헤매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수많은 카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수많은 카페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은 망하고 있는 것입니까. 좋아지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삶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조금씩 좋아지는 만큼 꼭 그만큼의 것이 사라지고 좀더 나빠집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것을 좋아진다고 말해야 합니까. 나빠진다고 해야 합니까. 빛은 어디에서나 옵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러면 그렇게 이루어질 겁니다.”
다름씨와 커피를 한잔씩 더 마시고 헤어지기로 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참고 및 인용<영화와 모더니티>, 자크 오몽 웹사이트 ‘이봉 랑베르: 책과 프린트 50년’ -“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정지돈
*롤랑 바르트가 진짜 한 말은 다음과 같다.“영화는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한다. 먼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둘째로 상영된 이후에. 결국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지나치게 대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