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윤성호 감독에게 먼저 질문하고 싶다. 원래 서독제에서 윤성호 감독에게 먼저 제안을 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적으로 다섯명의 감독들과 같이 작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윤성호 서독제가 개막식마다 옴니버스영화를 만드는데 그 전통을 잇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차라리 이걸 핸디캡으로 활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6팀을 섭외해 팀당 10분 안팎의 에피소드를 반나절 안에 찍는다고 하면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장편 완성이 가능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장편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들만 모시려 했다. 아닐 경우 야심을 품고 이 작품에 모든 걸 갈아넣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제한된 상황에서 작품을 완성할 만큼의 노련함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길 바랐다. 그런데 김소형 감독은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이라 할 만큼 그가 연출한 단편 <우리의 낮과 밤>을 인상 깊게 봤고,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의 각본을 쓴 송현주 감독은 서독제에서 먼저 함께 작업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주셔서 함께하게 됐다.
- 윤성호 감독이 제시한 핸디캡(하나의 신, 하나의 장소, 두 사람의 대화, 반나절의 촬영)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참여를 결심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한인미 핸디캡 때문에 고민했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하게 됐다. 장판을 찍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였는데 작품의 사이즈가 작아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생각만큼 작업이 녹록진 않았다. (웃음)
김소형 순발력이 부족해서 이런 프로젝트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됐는데, 처음 제안받았을 때 곧바로 떠오른 에피소드가 있어서 잘 발전시켜보면 재밌게 할 수 있겠더라. 마침 졸업하고 뭔가를 찍고 싶기도 했고, 참여하신 다른 감독님들의 작업도 궁금했다.
송현주 못할 것 같다고 여러 번 고사했다. 윤성호 감독이 말한 ‘모든 걸 갈아넣는 사람’이 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촬영 시간, 스탭 등의 조건에 전부 제한을 둘 예정이라 하셨고 그럼 잘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 도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최하나 나 역시 처음엔 이게 가능한 조건일까 궁금했다. ‘돈 없으면 영화 찍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오히려 ‘돈이 없으면 이렇게 찍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핸디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보자는 윤성호 감독의 얘기에 수긍이 갔고, 정말 시간 내에 깔끔하게 마무리돼서 만족스러웠다.
박동훈 개인적으론 이 핸디캡이 오히려 이 프로젝트만의 매력이라 여겨졌고, 한번 정면으로 돌파해보고 싶었다. 반나절 만에 촬영하는 게 걱정이 들지 않았던 게 요즘 근무시간에 맞추려면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 현장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거라 보진 않았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6개의 주제들
- 노조 문제, 지역 차별, 남성 혐오, 환경문제, 직장 성추행, 동물권 등 각각 다른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는 게 흥미롭다. 어떻게 주제를 골랐고 관객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나.
한인미 원래 자전적인 스토리로 많이 작업해온 터라 고민이 됐는데, 그때 주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육아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기 버거운 워킹맘과 워킹맘의 이른 퇴근으로 인해 종종 일을 도맡는 싱글 직원. 두 친구의 상반된 상황에 공감이 갔고, 이들을 모델 삼아 회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런데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성추행 이야기를 빼놓고 직장 생활을 논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성추행 문제까지 포함해서 극 중 인물들의 관계를 꾸렸다.
김소형 현재 반려고양이 국수, 춘장이와 살고 있다. 둘째 춘장이를 데려왔을 때 예상보다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아 당황했었다. 국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을이 병을 밀어낸다’는 프로젝트의 전체 주제를 들었을 때, 인간의 이해관계와 상황에 맞춰 고양이의 의도를 짐작하는 상황을 그려보면 괜찮겠다 싶었다. 국수가 직접 작품에 등장했는데, 낯선 이들이 촬영을 위해 집에 방문했고 결국 국수가 괴로워하는 상황을 만든 것에 미안함을 갖고 있다. 그래도 국수가 연기를 잘한 만큼 관객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윤성호 <프롤로그>는 5년 전 민주노총의 의뢰로 제작한 단편으로, 대기업 직원과 하청업체 사장의 대화를 그린다. 원래 작품에 포함할 생각은 없었고 가이드 영상으로 제공했었는데, 다섯 감독의 작품이 아슬아슬하게 1시간을 넘지 못했다. 새로 누군가를 섭외하기엔 여러 제약이 있어서 결국 <프롤로그>란 제목으로 맨 앞에 추가했다. 지난해만 해도 <프롤로그>를 촬영할 때와 노동환경이 많이 달라서 극의 내용과 맞지 않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올해 ‘근로 시간 69시간’, ‘노조 탄압’ 같은 문제들이 대두되는 걸 보면서 오히려 더 시의적절한 논제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송현주 종교로 인해 결혼을 망설이는 커플의 대화 때문에 종교가 주제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하려는 건 환경 이야기였다. 작품 주제를 정할 즈음 결혼했는데 물욕이 강해 청첩장도 초대 인원보다 많이 찍고 쓰던 가전제품들도 다 바꾸려 했었다. 남편이 ‘아직 멀쩡한데 굳이 새 거 살 필요 있냐’고 할 때 ‘나 좋자고 사는데 왜 자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했고, 그때 깨달았다.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를 지지하면서도 일상에선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자기비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연출했다.
최하나 2021년 제안을 받았을 당시에 내게 가장 깊이 남은 사건이 남성 혐오 논란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코미디라 느꼈고, 이에 관해 빠르게 대본을 쓸 수 있겠더라. 그런데 영화제를 돌고 개봉 준비를 하면서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2030 여성들에겐 자기 검열이 심해질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윗세대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이 단편을 보고서라도 사태에 관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동훈 영화 대사로도 나오는데, ‘영화 공부하러 유학 가서 헛짓거리한 애’가 나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당시 내가 ‘다행이네요’라고 말하자, ‘전라도세요?’라고 묻는 이들이 꽤 많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 이미 지역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건 상식과 같았는데도 해외라는 장소적 특성의 영향이었는지 지역차별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언젠가는 광주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이번 작품에 그 바람이 반영됐다. 긴장하지 않으면 흉한 차별에 동조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스산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 준비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한 자료와 대중의 반응 등 어떤 조사 과정을 거쳤나.
최하나 아마 내가 가장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지인들한테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으며 ‘혹시 이걸로 공격을 받게 될까’ 하고 물었다. 다들 당연하다며 각오한 거 아니었냐고 반문했다. ‘허버버법’이란 의성어 대신 ‘쭈왑쭈왑’ 등으로 바꾸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도 받았다. 그날 밤에 우울한 마음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하면서 ‘이런 영화도 못 만들 거면 그냥 어디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윤성호 감독님에게 이게 다른 감독님이나 서독제에 폐가 될 것 같냐고 물으니 ‘그런 일이 발생해도 같이 싸워줄 사람들이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걸 만들라’고 하셨다. 큰 힘을 받았고,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든 쫄지 말아야겠다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한인미 캐릭터의 모델이 된 친구들을 다시 만나 직장에 관해 세부적으로 물었고 결혼과 출산, 출산 이후 달라진 업무 환경과 상황 등에 대한 의견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직장인의 애환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경험한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이 이같은 일을 저지르는지 얼굴을 공개한 채 진행한 인터뷰를 많이 찾아봤고, 그런 정황을 팀장과 팀장이 벌인 사건에 투영시켰다.
박동훈 광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정했을 때 운좋게도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이 발간됐다. 이 책을 보면 어떤 국가적인 차별이 자행됐는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를 포함해 강준만씨의 90년대 저서들을 참고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일부 자료를 얻었다. 광주에 관해 확인할 게 있어서 젊은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명이 영화에 출연한 조윤서 배우다. 그에게서 요즘엔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엘사’라 지칭하며 조롱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로 영화를 마무리하면 ‘을이 병을 밀어낸다’는 프로젝트의 주제와도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설계를 했다.
송현주 그 당시 마침 내가 구독하던 채널의 유튜버가 롯데타워에서 눈물의 프러포즈를 치렀고, 그 영상을 비롯해 프러포즈하는 영상을 엄청 많이 찾아봤다. 원래 그런 데 냉소적인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걸 보며 울고 있더라. (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 주변에 비트코인을 하는 지인들이 좀 있어서, 그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넣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즐겁게 할까?
- <말이야 바른 말이지>라는 제목이 주지하듯 단편들 모두 대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본인의 작품에서 회심의 대사를 하나씩 뽑아준다면.
한인미 성폭력 피해자의 “제 영혼은 죽었어요”라는 대사를 고르겠다. 누군가에겐 과장된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의 진심이 담긴 중요한 말이었고, 다행히 배우가 정말 진실되게 잘 연기해주었다.
김소형 너무 가벼운 말인가 싶지만, “살찐 게 아니라 털 찐 거야”를 언급하고 싶다. 영화 포스터 뒤편에 하리보(국수)가 나오는데, 실물보다 너무 통통하게 나와서 마음이 아프다. 실제 하리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웃음)
윤성호 <프롤로그>에 “그게 아이러니거든요”라는 대사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송현주 “우리나라가 물에 다 잠겨도 나만을 사랑하고 지켜줄 거야?”라고 한 사람이 물어봤을 때, “그럼 우리 돈 벌어서 미국 가자”는 답이 온다. 그게 이 친구들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야기하고 싶다.
최하나 나는 “수컷이야?”라는 대사를 고르겠다. (웃음) 어떻게든 남성 혐오 논란을 타개하려고 개의 성별을 묻는 장면인데, 그 신에서의 배우 표정이 정말 좋고, 내가 쓴 것 중 제일 잘 쓴 대사라고 생각한다.
박동훈 “맛동산이 얼마나 맛있는데!”라면서 아빠가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반응이 없어 상처를 받았는데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를 다 알아야 웃을 수 있는 대사여서 그런 것 같다. 최근 VIP 시사회에 시니어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땐 웃음이 터졌다더라. 만족한다. (웃음)
- 작품 외적인 질문도 하나 드리고 싶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는데, 이 자리의 감독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나가고 있나.
박동훈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관객의 요구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공급자의 애매한 분석으로 인해 기획된 작품들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면 관객이 많이 들 거야’보다 어떻게 하면 관객이 즐거울지 계속 탐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하나 최근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순심중학교를 찾아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공동체 상영을 했다. 그 동네에 영화관이 없는데도 다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더라. 생각해보면 그 학생들도, 나도 <슬램덩크> 만화책이 나온 뒤에 태어났는데 영화까지 다 챙겨 볼 정도로 여전히 인기가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그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지, 이런 결론은 너무 순진한 것 같고. 다만 당시 같이 언급된 <E.T.> <쥬라기 공원> <매트릭스>처럼 좋은 작품은 세대를 막론하고 관객의 선택을 받는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이긴 했다.
윤성호 <말이야 바른 말이지>와 엮어 답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당장에 많은 관객이 들기보다 일정 정도 관객이 꾸준히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이 긴 작품이 되길 바라고 있다. 최근 쇼츠가 유행이고 나 역시 즐기고 있지만, 그것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성향은 다르다고 본다. 영화 관객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기다려서라도 좋은 작품을 볼 준비가 된 이들이 다수다. 그래서 나는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그런 관객을 만족시키고 5년 뒤, 10년 뒤에도 회자되기를 바란다. 나 역시 관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보탬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