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좋아지면 나이를 먹은 거라고 했던가, 길가에 핀 꽃을 찍기 시작하면 중년이 된 거라고 했던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이런 나이 듦의 신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 자신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더이상 젊은이에 낄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허둥대다 이도 저도 아닌 어른이 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김인선 감독의 영화 <어른도감>에서 제목을 빌려온 EBS <지식채널e> ‘어른도감’은 그럼에도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고백을 담은 시리즈다.
데뷔 48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는 젊었을 때 한 호흡에 하던 노래를 세 호흡에 나눠서 하는 방법을 터득하니 힘들지 않아졌다고 말한다. 학생들과 평어(반말)로 대화하는 수학 교사 이윤승은 그 시도의 결실로 “학생들이 나를 재밌어한다”라는 점을 꼽는다. 학교에 ‘그래도’ 재밌는 사람 하나 있는 게 좋지 않냐는 그의 말은 괜찮은 어른이 되는 일의 지평을 한뼘 넓혀준다. 소설가이자 트랜스젠더 여성 김비는 ‘외계에서 온 어른’이라는 타이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고난 몸과 불화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고 서른 무렵 성 확정 수술을 받은 뒤에는 성별 고정관념으로 인해 또 다른 억압을 느꼈지만, 지금은 자신을 어떤 틀에 몰아넣거나 가혹하게 다루지 않으려 한다는 그에게 오십이라는 나이는 온전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트로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노후에 성별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건강하지 못하다 여기는 비퀴어들이 어떻게든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육체의 경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노후일 수 있다는 그의 관점은 노화보다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결국 괜찮은 어른 되기의 첫 단계는 나이 들며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는 모양이다.
CHECK POINT
누가 ‘어른’을 대표하여 말하는가. ‘어른도감’ 시리즈의 아쉬운 점은 그동안의 출연자 중 김비 작가를 제외한 여섯명이 모두 나이 든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중 네명은 대학교수, 천문학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도서평론가 등 대중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은 직업을 가진 고학력자이기도 하다. ‘괜찮은 어른’의 조건이 사회적 성공이나 해박한 지식 같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삶에 관해 들려줄 어른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