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에는 조명이 깜빡거리고, 남자는 나이 든 여성 동료에게서 약을 받는다. 꺼질 듯하던 전기가 드디어 제대로 들어오고 여성이 화면 왼편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한밤중 노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과 달리 대부분 낮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지만 도입부는 밤의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를 충분히 각인한다. 빛을 기다리면서 정작 밤으로 향하는 연로한 여성의 걸음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처럼 유장한 패닝으로 연결된 흐름 안에 여러 차례의 역설을 배치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그냥 평일이야”라는 모호한 뉘앙스의 대화, 혹은 ‘하루에 세번’을 약 복용 주기가 아니라 정전의 횟수로 알아들은 천성(진영충)의 오해, 문과 밤과 빛과 불…. 영화는 단일한 숏 안에서 혼잡하고도 역설적인 정보를 거의 남용하듯 선보인다.
데니스 림은 비간의 롱테이크에 관해 “한숏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그 한계까지 밀어붙”인다고 논했는데, 적절한 지적이지만 이 문장은 유독 <카일리 블루스>의 2부에 배치된 40분가량의 롱테이크를 겨냥하는 듯 읽힌다. 그러나 <카일리 블루스>에는 정평이 난 해당 롱테이크 말고도 시간을 압축한다고까지 말하기엔 꺼려지지만 일반적인 극영화의 한숏/신보다 더 긴 호흡과 집중을 요청하는 (앞서 언급한 도입부와 같은) 숏들이 대다수이며 무엇보다 개별 장면은 낭비를 거부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량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영화는 편집 기술을 통해 시간을 메우거나 뛰어넘는 경제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봉합된 흐름이 고무하는 것은 현재의 연속성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동시에, 탈락될 수 없는 시간의 무료함 또는 고통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비간의 <카일리 블루스>의 매 장면은 흐름의 유지에 경도되면서도 (서사를 따라가기 위한 최소한의 ‘현재’의 위상은 고수하되) 여기에 부정확한 시간대가 공존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예감하게 만든다. 이는 길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매숏이 주관하는 프레임의 문제와 연관된다. 즉 여기 배치된 것이 직후의 그것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계속해서 의문시하게 만들고, 나아가 사후적으로 소급하여 비교 대조하게 만들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번잡하게 조직된 세계가 <카일리 블루스> 안에 있다. 어떤 사물은 여러 인물과 동시다발적으로 연루되고, 또 어떤 인물들은 얼굴과 연령은 다르지만 이름과 행동이 같으며, 다중적인 사태들이 한 인물의 삶에 끼어들며 시제와 경험을 교란한다. <카일리 블루스>는 어쩌면 원테이크를 통해 누적되는 “강도”보다도, 매 장면 안에 들어선 정보와 심상의 어지러운 ‘밀도’와 더 결부되며, 그래서 현재를 고수하면서도 무너뜨리는 기이한 시간성을 지니게 된다.
다중적인 연대기의 가능성
물론 2부의 롱테이크에서도 우리는 이 영화의 혼잡한 감각과 마주하게 된다. 롱테이크는 대상을 중단 없이 한번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미달도 초과도 아닌 온전한 시간 내로 정확한 포착을 수행한다고 상상하게 만들지만, 비간은 곁길로 새거나 시선을 돌림으로써 카메라의 동선을 잠깐씩 이동하기도 한다. 단일한 흐름 안에서도 생략은 가능하며 이는 현재의 감각과 대치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미용실 앞에 서 있는 천성 옆에 있던 카메라는 그 앞의 양양을 따라가다 그녀가 탄 배에 동승해 강 건너편에 당도한다. 쭉 그녀를 좇아 흔들다리를 걸은 뒤 다시 마을로 돌아오면, 우리는 이전에 영업이 끝났다던 미용사에게서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천성을 보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미용사와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거기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걸까? 비가시화된 사태가 연속성이라는 얼레에 감기면서 (시각적으로) 누락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자극한다. 문제는 그냥 관객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시간이 되는 게 아니라, 곳곳에 존재하던 소재들이 뒤섞이며 시간 선을 흩뜨려놓는다는 점이다. 가령 천성은 동료 의사가 옛 친구에게 전해주라던 셔츠를 자기가 입고, 그에게 줘야 할 카세트테이프는 죽은 아내를 닮은 미용사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미용사의 손을 손전등으로 비추기도 한다. 모두 천성의 동료 의사와 옛 친구가 과거에 했(다)던 일이다. 이로써 <카일리 블루스>는 숏마다 산재하는 요소들의 역할과 기능, 이를 아우르며 다양한 갈래를 포괄하는 (비)편집을 통해 다중적인 연대기의 가능성을 포섭하는 서사로 나아간다.
양면을 바라보기
한편 <카일리 블루스>에서 어린 웨이웨이가 전위안으로 가게 된 경위는 꽤 상세히 제시된다. 이것은 천성이 없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늦은 밤, 시계를 그리며 놀던 웨이웨이네를 찾아온 땡추는 그를 며칠간 전위안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이때 천성은 어디 있었던 걸까? 쉽게 생각하면 당연히 자기 집에 있었겠지만, 천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카일리 블루스>에서 그의 여정의 계기라 할 만한 부분에 그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화면 왼편에서 시끄럽게 지나가는 열차가 데페이즈망으로 기입될 때, 거기에 탑승해야 할 인물이 지금 부재한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나-주체 없는 시간으로 향하는 영화의 의미심장한 표현이다(물론, 천성은 그 이상한 기차에 이미 타고 있을 수도 있다).
관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잦은 인서트숏이다. 집에 혼자 있던 웨이웨이에게 문을 열어준 뒤 천장에 달린 미러볼을 본 천성은 잠깐 멈추는데, 곧이어 남자의 뒷모습과 굴러오는 미러볼의 이미지가 삽입된다. 강한 콘트라스트 때문에 ‘현재’와 확실히 대비되지만, 미러볼이라는 사물 말고는 아무런 서사적 연관성을 제시하지 않는 이러한 장면은 거의 공중에 난사된 것과 다를 바 없기에 판단을 유보시킨다. 이 장면은 이후에 더 많은 정보와 함께 다시 나타나는데, 이때 우리는 이전 인서트숏에서 봤던 천성의 뒷모습이 사실은 그가 물기 어린 거울을 벽 삼아 등을 기대고 있어 반사된 형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후경이 흐렸던 이유는 그것이 습기가 찬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카일리 블루스>는 전면과 후면을 번갈아 제시하면서 반복적으로 혼란을 야기한다(그러고 보니 <카일리 블루스>의 타이틀은 30분쯤 지나 뜬다. 동굴 같기도 터널 같기도 한 장소에서 천성은 맞은편에서 오는 바나나 장수와 마주쳤다 인사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다. 카메라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암전된 화면에서 제목이 떠오르고, 다시 오른편으로 패닝하면 직전에 천성의 반대편으로 향했던 남자의 뒷모습이 담긴다. 느닷없는 제목의 등장은 이를 기점으로 영화를 다시 관람해달라는 미약한 주문이 된다. 동시에 우리는 잠깐의 검은 화면을 통해 데칼코마니 같은, 그러나 각기 다른 두 남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마주하게 된다).
1부의 놀이기구 장면. 한명씩 탑승하는 우주선에서 앞에는 웨이웨이가, 뒤에는 천성이 타고 있다. 이 장면은 웨이웨이의 시점숏이므로 그의 얼굴은 담기지 않는다. 웨이웨이가 뒤를 돌아 삼촌을 보려 하자 천성은 “앞을 보라”고 말하는데, 이 순간은 종장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태워준 청년의 이름을 그제야 알게 된 천성의 얼굴을 불시에 담는 클로즈업과, 그 직후 천성이 고개를 돌려 뒤편의 마을을 응시하는 모습과 공명한다. <카일리 블루스>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뒷면, 거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를 아련하게 소급한다.
인물들이 이동할 때마다 번갈아 제시되는 전면/후면의 반복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음을, 관객의 눈은 인물의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필연적 사실을 효과적으로 발설한다. <카일리 블루스>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비정합적인 세계를 교차하는 동시에 이 세계를 끈질기게 좇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 영화는 신비로워지기도 혹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아무쪼록 천성은 어린 웨이웨이에게 문을 열어주고, 당마이의 웨이웨이에게는 오토바이를 풀어준다. 한편 원시인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웨이웨이가 묶어준 막대를 그냥 길바닥에 버린다. 혹여나 모종의 감옥에 갇히더라도 자신의 지도를 그려보려는 듯 그는 잠긴 것을 해제한다. <카일리 블루스>는 세계를 통합하려는 욕구보다 단순한 의미로서 방랑의 기록 자체를 담기로 한다. 거기에는 내가 떠나온지도 몰랐던 과거까지 함께 있지만, 이를 특정한 시제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드는 잉여 또한 상존한다. 천성은 이 불안정한 기착지에서 수상한 시간을 살아본 뒤 귀환할 예정이다. 막차를 소재로 한 어느 시의 구절처럼,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 뒷모양을 오래 쳐다보게 한다.”(김소연, <막차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