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이었다. 채도와 명도가 높은 파란색 파도가 휘몰아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주위 사람들도 웃거나 탄성을 질렀다. 공항 건물이 살짝 흔들린 것도 같았다. 귀국한 아티스트 J가 공항 출구에서 자신의 차로 향하는 시간은 10여초였다. 몇 시간을 기다린 팬들이 그를 따라가며 환호한 것은 물론이고, 나처럼 누군가를 마중 나왔다가 난데없이 그 파도를 맞은 사람들도 왠지 들떠 웅성거렸다. 누군가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건 K팝 스타의 인기라든가 팬들의 ‘열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공기를 눈부신 것, 차가운 것, 또는 열렬한 것, 간지럽고 조금 눈물 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랑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이만한 에너지를 가진 건 사랑밖에 없다.
사실 팬덤 문화에 대해서라면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한반도의 팬덤 역사에서 나는 신석기인쯤 될 것이다. 90년대 초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열풍이 시작되기도 전, 종로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재킷에 끌려 그들의 1집을 구매한 중학생으로서(한국에서는 2집이 먼저 인기를 끌었다), 나름의 자부심과 추억을 수십년째 간직하고 있다. 인류는 나날이 기술을 혁신하고 문화를 바꾸어왔지만, 우리 본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팬이라면 순정한 사랑을 안다. 구석기시대부터 그랬다.
다만 그날은 두세 걸음 떨어져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빗길 운전에 긴장했고, 주차 자리를 찾느라 진땀이 났다. 점심을 거르다시피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긴 비행을 마친 사람을 기다리게 할까 봐 서둘렀는데, 출구 근처는 한 무리의 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접이식 사다리와 커다란 카메라 등 꽤 전문적인 장비도 보였다. 모 그룹의 팬인 비읍이가 해준 ‘현장에 가지 못하는 팬 대신 사진을 찍어주는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읍이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현대 문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저 무리 중 한두명은 그런 사람이겠지, 조금 도끼눈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 파도가 덮친 것이다. 기쁨으로 가득한 사랑의 파도가.
흔히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도 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줄곧 의심을 품어왔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은, 사랑을 해본 사람 아닐까?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사랑의 진짜 기쁨은 사랑을 주는 데 있다는 걸. 그 기쁨은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던 사람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여운이 남은 대기실에서 사람들은 자리를 다시 잡았다. 나오는 이가 처음 보는 사람이 꼭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팻말로 서로를 알아보고 악수하는 사람들, 가족을 맞이하면서 거의 우는 사람들, 친구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폴짝폴짝 뛰는 사람들 너머로 나도 남편을 찾아 고개를 뺐다. 기뻐서 자꾸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