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안나푸르나’, 성급하고 성찰없는 과거의 연애담
2023-06-07
글 : 정예인 (객원기자)

강현(김강현)은 얼마 전 전역한 후배 선우(차선우)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등산길에 오르자고 제안한다. 선우는 몇 차례에 걸쳐 거절하지만, 강현의 고집에 결국 산행에 나선다. 수년 만에 만난 강현과 선우는 태풍이 불기 직전의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주된 화제는 연애사다.

선우는 자신을 짝사랑했던 여자를 떠올리며 그녀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하면서 비겁하게 굴었던 일을 털어놓고, 강현은 <건축학개론>의 수지를 닮은 여자를 떠올리며 상대가 나를 이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 괜찮다고 자기 위안했던 일을 되새겨본다. 두 사람이 과거의 연애담을 주고받으며 걷는 사이 산의 정상은 점차 가까워진다.

<안나푸르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연애나 사랑, 관계에 대해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등산하는 두 남성의 대화 가운데 강현과 선우의 에피소드를 플래시백으로 배치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오가는 강현과 선우의 이야기는 성급한 정의로 점철돼 있다. 사랑이나 관계에 대한 통찰 혹은 고통스러웠던 연애 경험이 보여줄 수 있는 개인의 내면에 대한 숙고는 없다. 그보다 ‘등산=(연애)관계’라는 간편한 도식을 인용하여 사랑에 관한 익숙한 수사를 반복한다. 이때 두 남성이 ‘갖지 못한’ 여성들은 그저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산”인 안나푸르나에 빗대어질 뿐이고, 그 여성들의 마음이나 사정은 알 길이 없다. 강현이 적확하게 언급한 것처럼 관계란 그것을 맺는 둘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쪽의 시점만으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기에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플래시백 속 여성들의 모습은 강현의 말과는 달리 두 남성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조각처럼 보인다. 하나의 주체가 아닌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버린 은정, 푸름, 안나, 은채. 그들은 두 남성이 주고받는 가벼운 농담(?)과 진담 사이를 표류하며, 하나의 주체이기보다 남성의 세계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대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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