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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마주 보기의 불가능성을 마주보기,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슬픔의 삼각형’
2023-07-1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지난해와 올해 칸영화제에서 소개된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과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폐쇄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배경은 미지의 소행성이 발견된 건조한 평원이다. 혜성 관측일에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 출몰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물의 이동이 통제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망망대해 위의 크루즈와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 생존자들이 모인 외딴섬을 주된 장소로 삼는다. 영화에서 특정 장소에 갇히거나 이동이 통제된 인물을 보여줄 때, 그것은 영화관에 모인 관객의 비유로 인식되곤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움직임이 제한된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관객은 갇힌 이들을 통해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다고 이야기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한정된 장소와 이동의 통제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거의 동시적이라 말해지는 극장의 위기와 팬데믹은 영화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를 일상에 침투한 재난 상황에 관한 비유로 바꾸었다.

팬데믹 이후라는 맥락에서 <슬픔의 삼각형>과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놓을 때, 두 영화에서 팬데믹은 하나의 소재로 쓰이기보다는 영화의 근원을 다시 보게 하는 창구 혹은 틀이라는 다른 가능성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두 작품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어떤 몸짓을 취득하거나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혹은 같은 몸짓이 어떻게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이게 되었나를 보게 한다. 이때 중요한 매개는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사진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와 기록으로 기능했다. 반면 조작이 손쉽고 정교해지면서 신뢰성을 상실해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전쟁 사진작가라는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의 직업은 설정일 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그는 전쟁과는 무관한 장면들을 촬영하며, 그의 직업은 다른 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촬영하는 습관의 좋은 핑계가 될 뿐이다. 전쟁 사진을 찍지 않는 전쟁 사진작가는 나아가 리얼리즘 이미지가 처한 전반적인 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광고와 화보 사진이 존재한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탑승한 모델 커플 야야(샬비 딘)와 칼(해리스 디킨슨)의 사진은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위장한 일종의 광고다. 일광욕이나 식사 도중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파스타를 한 움큼 집어들고 먹는 포즈를 취하는 야야를 본 다른 탑승객이 파스타를 실제로 먹을 거냐고 묻는데, 이는 무용한 질문이자 쓸데없는 사족이다. 파스타를 든 인물이 실제로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는지 여부는 사진의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배우 밋지(스칼릿 조핸슨)가 몸을 살짝 숙이자,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그 자세로 멈춰달라고 부탁한다. 밋지는 방금 무의식적으로 했던 동작을 의식적 상태로 반복한다. 두편의 영화는 진실에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 실체를 폭로하듯 말로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동작을 두번 반복하는 것이다. 한쪽이 사진 위에 일상화된 허구성을 지적하는 대화를 덧붙일 때, 다른 한쪽은 동일한 동작이 사진이 인화되는 것처럼 진실에서 진실과 비슷한 것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을 지켜본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필름 사진을 찍는다. 현상하기까지 기다림을 동반하는 필름 사진은 사진이 기억의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을 매개로 한 기억은 그리 오랜 시간 간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고 다시 현상되기까지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영화에서 전쟁 사진을 대체한 것은 밋지의 사진만이 아니다. 오기가 포착한 외계인 사진은 엄격한 통제를 뚫고 도시 밖으로 전파되어 사회적 파문과 변화를 불러오면서 전쟁 사진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때 외계인 사진은 그럴듯하기보다는 조악함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동그란 흰 바탕에 검은 점 두개로 표현한 눈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단순한 외양은 컴퓨터그래픽이 상용되기 이전에 일차원적으로 제작된 크리처처럼 보이고, 그를 찍은 사진은 외계인이 등장한 B급 고전영화의 기록용 스틸처럼 보인다. 허구의 외계인을 찍은 리얼한 사진은 무대와 텔레비전, 영화를 관통하는 허구의 역사가 전쟁 사진의 리얼리즘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의 전환적 회복이기도 했음을 증명한다.

마주 보는 것

<슬픔의 삼각형>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종종 등장하지만, 사진이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칼이 노트북 작업을 하는 장면에서 흐릿한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야야의 사진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관객은 그저 찍히는 몸과 찍는 몸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을 보게 될 따름이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찍을 때 상대방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찍는 경우는 드물다. 칼이 야야를 찍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놓인 두개의 선베드 위에 몸을 기댄 채 방향만 상대방쪽으로 튼 자세가 된다. 야야와 칼의 사진 촬영 숏 직후에는 이들을 모방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남자와 포즈를 취하는 여자가 거울상으로 맞붙는다. 늙은 남자는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상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기도 귀찮다는 듯 벌러덩 누운 자세로 손만 뻗어 버튼을 눌러댄다. 사진 찍는 장면이 사진을 대체한 광경은 사진의 아우라 상실의 원인이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사진 찍는 행위의 무성의함에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무성의한 태도는 사진을 찍을 때 삭제되어버린 마주 보는 행위의 부재로 단적으로 표출된다.

마주 보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리포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방송을 준비할 때나 칼이 모델 면접을 보는 시퀀스처럼 압박받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마주 봄은 2부에 잠깐 등장하는 한 남성 승무원과 관련된다. 사진을 찍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야야와 칼은 맞은편에서 작업 중인 승무원을 눈여겨본다. 선글라스를 낀 짙은 피부의 남성은 작업 전 상의를 벗은 채 몸에 오일을 바르며 커플의 눈길을 끈다. 승무원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야야가 인사를 받는다. 카메라는 올려다보는 야야와 칼의 시선과 살짝 내려다보는 승무원의 시선을 나누어 포착한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마주 보는 상황을 전제하지만, 이들의 실제 위치를 조망할 수 있는 마스터숏은 등장하지 않기에 마주 봄은 어딘가 미심쩍은 것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잠깐의 마주 봄에 의해 남자는 크루즈에서 하차하는 뒷모습으로 퇴장해버린다.

마주 보는 행위의 불가능함 혹은 위험함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예견된 바 있다. 칼과 몇몇 모델들은 진행자의 주문에 따라 브랜드의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연기를 즉흥에서 실행해 보인다. 저가 브랜드가 친밀하고 밝은 미소로 관객을 끈다면, 고가 브랜드는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위엄을 내세운다. 배우들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이 표정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고 느껴진다. 당신은 ‘발렌시아가파’인 가, ‘H&M(에이치앤엠)파’인가. 둘을 오간다거나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농담에 H&M식으로 웃을 수 있는가, 혹은 발렌시아가식 무표정으로 전혀 웃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서 마주 보기란 어디까지 견디거나 참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종의 테스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주 보는 숏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보되,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진 않는다. 배우가 다른 배우와 대화한다는 전제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 마주 보기는 현대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밋지의 방과 오기의 방은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창은 창문 없이 차광막이 달린 사각의 구멍으로, 조형적인 실내와 더불어 세트 느낌이 강화된다. 창가에 기댄 얼굴로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선 밋지의 얼굴과 실없는 말들은 오늘날 각자의 집에서 개인 방송하는 유튜버를 연상시킨다. 창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한다. 창은 대화를 나누는 창구이자, 작은 연극 무대 혹은 리허설 현장이다. 밋지는 몇개의 시퀀스를 즉흥에서 연기한다. 샤워 이후 가운으로 갈아입는 노출 장면과 약을 털어넣고 욕조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는 상황을 연기하며, 오기에게 상대역을 하도록 유도한다. 오기의 방이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이라면, 밋지의 방은 사진을 촬영하는 스튜디오다. 밋지가 포즈를 취하면 오기는 촬영을 한다. 마주 보기는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뤄진다. 사람들이 고전적 VR 기계라 할 머리 하나 크기의 박스를 쓴 채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달한 붉은빛을 관측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초록빛과 함께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멍하게 외계인을 바라보는 사이 외계인은 보호 장치를 해제하고 소행성을 취득한다. 오기가 목에 걸린 필름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올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외계인은 방금 취득한 소행성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이에 응한다. 외계인이 마주 보기의 대상으로 들어온 것은 대면이 유예되었던 시기의 불가능했던 마주 보기를 기억하는 것이자, 되찾은 마주 보기의 기이함을 과장하는 것 같다.

거리를 두는 것

마주 보는 행위는 거리를 전제로 하는 행위다. 최소한의 거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서로 마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은 정면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프레임에 각각 담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이를 보충하듯 마주 보는 사람들의 측면숏을 통해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실제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측면숏의 의미가 단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인물이 서로 마주 볼 때, 관객의 시선은 언제나 그로부터 비켜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볼 때 관객은 그와 마주 본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리액션숏이 등장함에 따라 마주 보는 느낌은 깨어지고 조정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처럼 불가능을 긍정하는 한눈팔기를 허용한다. 관객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눈 맞춤을 가로지른 저 너머를 향하게 된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곳에선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관객이라는 공동체가 잃어버린 장소를 가리키는 가상의 조형물이 우리를 마주 본다. 배경 이미지는 고전영화의 풍경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며 영화는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의 한 세기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슬픔의 삼각형>을 마주할 때의 거리감과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일정한 거리감을 통해 정념을 건드린다면, 후자는 관객과의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시종 관객을 겨냥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둘로 나뉜 세계를 전제한다.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거나, 둘을 오갈 수 있다는 비선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의 풍자에 함께 웃거나 불쾌해하거나다. 병증 이후 ‘인 덴 볼켄’과 ‘나인’ 등 딱 두개의 독어로 긍정과 부정을 전달하게 된 테레즈(아이리스 베번)는 이분화된 세계에 허락된 두 가지 반응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다. 크루즈 안에서 게워내는 토사물과 나부끼는 몸마저 우연으로 점철된 놀라운 광경이기보다 예견되고 약속된 정돈된 동작처럼 보인다. 중간의 것, 애매한 것은 모두 솎인 자리에 남은 것은 전복이 아니라 속물과 아름다움이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섞는 회귀의 광경이다. 그러나 관객은 의도된 이야기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계급을 요트 위에 축소한 듯 굴지만, 실제 요트에서 보이는 것은 젊은 주인공과 나이 든 승객의 대조일 뿐이다. 영화라는 이미지의 계급 안에서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이를 이길 수 있는 부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탑승객이 승무원에게 억지로 물에 몸을 담그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주는 감정도 굴욕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가 설정한 계급은 관객의 심리에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때때로 이 사실을 망각한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단단한 이야기가 시각과 심리에 있어서의 미끄러짐과 이탈을 초래했다면. 웨스 앤더슨은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이미지의 세계를 짓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배경과 사물은 실제보다 작게 보인다. 특히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자체로 가공된 미니어처라는 느낌을 지속해서 불러온다. 다른 매체와의 비교 속에서 영화가 거대함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때, 웨스 앤더슨은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지기를 택한다. 두드러진 세트의 활용은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지만, 허구성은 세계의 진실을 돌려놓는다. 세트는 다른 세트에 의해, 허구는 다른 허구에 의해 감싸여 있다. 진실은 허구와 허구 사이를 지나칠 때, 그 사이에서 언뜻 비추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구조에 관해 언급할 때 극중극이라는 말보다는 극바깥극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극중극은 전체로서의 극이 하나의 극을 감싸는 형태지만, 극바깥극은 극 이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극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작은 구멍을 내고 틈새로 빠져나가면서 두개의 극 중 어느 것도 충분한 사실성과 허구성을 획득하진 않는다. 오기가 겹겹이 싸인 두 층위의 무대를 연속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분리된 것으로 인식된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폭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오기가 건물 내부를 통과해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왔을 때, 프레임을 오른편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옆 건물 비상계단에 선 한 인물이 보인다.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마고 로비)로, 본편에서는 사진으로만 등장했다. 순간적으로 오기가 죽은 아내를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인가 착각하게 되지만, 커다란 가발을 쓰고 귀족부인 분장을 한 배우는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일 뿐이다. 극장가의 네온사인을 후면에 두고 공중에 붕 뜬 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마치 발코니형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부로 등장했지만, 실제는 몇번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즉흥에서 본편에서 삭제되었던 대사를 읊는다. 극 중 죽음을 맞은 배우가 멀쩡히 나타나는 것은 본편의 설정을 깨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지만, 여기에서는 카메오로 사라지는 단역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관계의 서사와 감정을 도리어 생성한다. 배역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는 잠깐의 시간이 주는 어딘가 찡한 감정은 죽은 아내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이라는 착각이 주는 벅찬 감정과 무람없이 뒤섞인다. 그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몸짓과 되찾은 몸짓, 일상적인 몸짓과 영화적인 몸짓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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