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소모할 수 있다는 느낌, 이 느낌에서야말로 우리는 잘게 썰어지고 다른 배열 속으로 내팽개쳐질 수 있다.” - 마니 파버, <흰 코끼리 예술 vs. 흰 개미 예술>
사막이 흔들린다. 종군 사진작가인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와 그의 아이들이 작은 카페에 찾아올 때, 원자폭탄 실험의 여파로 실내 공간이 크게 진동한다.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바깥의 굉음과 폭발이 무슨 전모로 벌어진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오기는 단지 눈앞의 연기구름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제목에 명시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미국 서부의 사막에 세워진 모형 도시이자 1950년대 브로드웨이 연극의 무대 배경이다. 앤더슨은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작은 마을을 로케이션 삼아, 50년대 미국의 기호적 요소들을 덧씌운다. 몇겹의 가상이 겹쳐진 틀로 형성된 사막이 그곳에 있다. 흩날리는 모래 먼지와 탁한 공기가 없는 무대로서의 사막. 영화가 직면하고 다양한 종류의 외지인이 방문하는 곳은 바로 그 사막이다.
하지만 사막은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사막은 침묵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50년대 미국이라는 영화 문화를 둘러싼 수많은 단면이 그 공간을 침입한다. 열차와 자동차, 원자폭탄과 운석을 포함해 종군 사진기자, 영화배우, 카우보이, 천문학 영재, 군대와 정부, 그리고 외계인이 차례로 들어선다. 단 한컷의 수평 트래킹숏으로 모든 외관을 관측할 수 있는 인구수 87명의 한정된 마을은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이고 표면상의 혼란스러운 계열을 형성한다. 사막에 세워진 평면 위에 서부극과 SF, 연극 무대와 전쟁영화, 4:3 비율의 흑백과 시네마스코프, 외계인의 공포와 가족 멜로드라마의 파편이 산만하게 뒤섞인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마스터>에서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풍경을 종교적 믿음에 사로잡힌 두 남자의 육체적 관계를 매개로 관찰하고, 토드 헤인즈가 <캐롤>에서 더글러스 서크를 참조 삼아 50년대 멜로드라마의 규범과 억압을 레즈비언 커플의 관계에 이식해 재구성한다면, 웨스 앤더슨이 향한 1950년대 미국은 무작위적인 기호의 교란과 충돌로 혼란스럽다. 욕조에 누운 여배우 밋지 캠벨(스칼릿 조핸슨)과 오기의 죽은 아내가 남긴 사진이 유사하고, 오기가 촬영한 밋지의 자세와 소행성을 훔치는 외계인의 자세가 닮은 것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의미가 없는 대신 미스터리와 수수께끼가 교차하고 반복된다. 웨스 앤더슨은 50년대 미국의 사막을 중심부가 비어 있어 영화사의 기억이 무작위로 혼재되고 투영되는 비정형의 무대로 간주한다.
50년대 미국의 사막이라는 장소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이야기는 다층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도입부에 나오는 화자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소동극이 극작가 콘래드와 배우들이 제작하는 연극 무대라는 것을 설명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담아내는 불투명한 물질적 대상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20세기의 자취를 더듬던 앤더슨은 시계를 맞춰 1950년대라는 명시적 과거로 향한다. 그의 렌즈에서 미국의 50년대는 장르영화의 배경과 연극 무대의 관습이 몽타주된 형태로 굴절된다. 이 시기의 증상에 관해 엉뚱한 곳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고 싶다. 미국의 비평가인 마니 파버의 독특한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는 이전까지 미국영화가 견지하던 자유로운 공간 배열과 무심한 동작의 기예를 잃고 “공간의 전경에 평행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나열된 배우들”을 보여주는 회화적 평면성을 성취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는 흔히 스튜디오 시스템의 마지막 황금기로 여겨지는 50년대 미국영화가 과장된 연기와 구도, 공격적인 스타일을 수용하면서 어색한 현대예술처럼 변해갔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인 영화사의 관점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파버의 평가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분석은 50년대 미국영화에 나타난 작은 전조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웨스 앤더슨의 장면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인다. 정적으로 나열된 인물, 회화적 평면성의 구도, 공격적으로 도드라지는 작가의 스타일. 1950년대에 발견된 ‘타락’의 징조들은 웨스 앤더슨을 지시하는 작가적 요인들과 미묘하게 맞물린다. 마치 외계인의 우주선처럼 파버의 지적은 다른 시공간에 놓인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안착한다.
의도한 선택은 아닐 테지만, 웨스 앤더슨은 1955년의 사막과 브로드웨이 연극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50년대에 시작된 미국영화의 ‘타락’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도착해 극단적으로 폭발하고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배열과 동작은 앤더슨 영화의 것이 아니다. 그는 사소한 동작과 제스처까지 통제하는 연출자다. 그리고 그의 작가적 특징은 원점과도 같은 50년대 미국의 사막에서 연극과 영화, 인간과 외계인을 넘나들며 과시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어쩌면 이곳은 과거의 유산을 갉아먹는 미국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점이자 웨스 앤더슨이 창안한 작가적 형식의 특이점을 동시에 가리키는 좌표인지도 모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방향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무대를 설정한다. 원자폭탄은 전조 없이 폭발하고, 우주선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찾아온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가 접합할 수 있는 바깥은 존재하지 않고, 기호들의 연계와 중첩만이 화면의 활동을 이루는 한계점을 주시한다.
장면에 비치는 대상의 위계를 만들고 지배적인 의미와 주변적인 활동을 분류하는 데서 영화의 맥락과 구조가 생산된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떤 행동과 사건에도 일관된 맥락을 부여하지 않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난데없는 출현과 교차로 가득하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가고 되돌려주는지, 연극의 연출자는 배우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극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무슨 의미를 말하는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 요소들은 더 높은 맥락에서 화해하거나 결합하지 않고 표면 위에 남겨진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영화는 정해진 시간에 선로를 달리는 기차의 운행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지속되는 불가피한 활동이다.
왜 앤더슨이 창조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의미를 해결할 수도, 이야기를 종결할 수도 없을까? 영화의 결말을 앞두고, 무대에서 잠드는 연기를 주문하는 콘래드 앞에서 배우들은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고 외친다.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잠과 각성의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역설하는 이 명제는 영화가 잊어버린 한 가지 경험을 환기한다. 영화의 특권은 관객을 잠들게 하는 역량에 있었다. 잠드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멈추거나 꿈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더 넓게 말한다면,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잠자는 시간과 맞닿아 있다. 21세기에 여전히 영화를 보는 자는 밝은 세계를 외면하고 어둠에 파묻혀 비생산적이고 비활동적인 시간을 통과하는 종족이다. 시종일관 밝은 바깥이 있다면 그에 대비되는 어두컴컴한 내부가 있다. 그렇게 활동과 비활동과 중단을 오가는 리듬을 간직하면서 영화라는 경험은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누구도 잠들지 않는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연극 무대를 소개하는 화자는 조명 기사에게 당부한다. 사막의 태양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 다만 늘 투명하고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어야 한다. 사막엔 어둠이 드리우지 않는다. 모두가 굴절 상자(Camera obscura)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면, 우주선의 녹색 빛이 그들을 비출 것이다. 뜨고 지는 주기의 리듬을 잊어버린 빛에 상시 노출된 이들은 늙지 않는다. 마모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외계 전파가 보내는 날짜는 언제나 ‘오늘’에 맞춰진 것처럼, 그들에게 내일은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완벽하게 닫힌 세계다. 앤더슨은 격자형의 창틀과 문을 강박적으로 여닫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프레임의 외부는 극단적으로 불투명하다. 그곳을 영화의 활동이 멈춰버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격리된 내부는 멈춰 있고 바깥의 정체는 모호하다. 앤더슨은 연극의 장치를 매개로 건축적 세트장과 오래된 문화의 기호들을 묘기 부리듯 넘나들지만, 그 어디에도 영화의 해답을 구할 수 있는 출구나 목적지를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여기서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지배하는 내부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는 길은 어디인가?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주기 위해 지구에 돌아오면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내려진 격리 해제는 취소된다. 그들은 탈출할 수 없다. 상황은 통제를 넘어선다. 사람들이 일제히 흥분하고 난장판이 벌어지자 오기는 세트장을 탈출해 무대 바깥으로 나간다. 그는 수염 분장을 뜯고 ‘오기’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존스로 걸어나온다. 백스테이지로 향한 존스는 연출자 슈베르트에게 말한다. 연극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존스는 이야기의 의미를 구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 않는다. 연극의 연출자도, 그 뒤에서 타자기로 텍스트를 쓴 극작가도, 액자 형식을 설명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부연하는 화자도 혼란스럽게 뒤얽힌 픽션의 상태에 답하지 않는다.
존스는 그 바깥으로 나간다. 바람을 쐬고 싶다고 나간 극장 밖의 난간에서 존스는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와 만난다. 인공적인 눈이 내리고, 연출된 바람소리가 들리는 난간에서 두 사람은 연극에서 삭제된 부부의 대화를 연기해본다. 그 장면의 대화는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설명하는 순간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편집되었다. 그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에서, 연극을 제작하는 백스테이지 문밖에서, 인물이 붙잡고 있던 삶의 의미를 기억해낸다. 연기한 배우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연출자의 판단으로 공연에서 삭제된 무대 ‘바깥의’ 장면을 빌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바깥과 조우한다. 하지만 규칙을 초과하는 허구의 무대인 그곳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장소가 아니다. 카메라는 몇번이고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사막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기호들이 중첩된 사막의 표면에서 웨스 앤더슨이 창안한 영화적 장소가 일으키는 내적 파열음이 새어나온다. 외계인을 촬영한 오기는 사진에 남겨진 그의 표정에서 “너흰 다 끝났다”라는 의미를 읽어낸다. 그와 대화하던 밋지는 어쩌면 끝났을 수 있다고 화답한다. 종말은 그들에게도 익숙하다. 종말은 픽션의 약속이다. 사건이 나타났다면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종말조차 도래하지 않는, ‘끝’을 가리키는 표상을 마련할 수도 없는 이해 불가능의 모형적 세계다.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변화의 여정이 사라진 투명한 세계, 서사의 부식이 없는 곳이다. 웨스 앤더슨의 허구적 인물들은 서서히 사라질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된 세계에 던져진다.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2011)에서 세계가 끝나는 종말의 형식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시간에 맞춰 예고되어 있다. 인류는 그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 클로즈업된 두 사람의 얼굴을 백색으로 물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가리키는 투명하고 평등한 종말의 자리를 시각화한다. 우리는 이렇게 소멸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말은 잠드는 것처럼 우리가 머무는 세계에 엄습한다. 지구 최후의 날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웨스 앤더슨은 다른 종말의 형식을 상상한다. 그것은 소멸의 가능성마저 백색으로 사라진 눈뜬 세계의 출현이다. 조명은 계속해서 태양빛을 방출하고, 영화의 모든 장면에 빛이 물든다. 피사체는 거듭해서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다면, 그 빛을 회피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콘래드가 죽은 뒤에도 사막의 마을로 돌아오는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이 세계에 결말을 내릴 수 있는 창작자라는 최상단의 근거는 사라졌다. 웨스 앤더슨은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사막에 세워진 도시의 외관을 수평 트래킹으로 관측하는 에필로그를 묘사한다. 오기는 밋지가 사라진 그녀의 집을 바라보며 묻는다. “다 어디 갔죠?” 하루 사이에 격리가 해제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첫 장면에서 본 것처럼, 마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외계인이 출현하고 마을 전체가 격리되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사막에 세워진 건물들의 외관만 남겨진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사멸하는 것들의 흔적이 감춰진 영원한 평면적 기호의 세계다. 스크린은 어떤 맥락의 이해도 없이 순식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표면적 기호들의 난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은 사막에 도착한다
웨스 앤더슨은 이 끝나지 않는 시공간을 바라본다. 1950년대의 흔적에 붙잡혀 썩지 않는 영화의 물질성을 들여다본다. 웨스 앤더슨이 시도하던 모험과 여행의 방법론은 유효하지 않다. 시작점과 도착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사이를 잇는 여정을 관측하던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영화의 흔적과 기호들로 가득하지만, 이곳은 영화와 불화하는 낯선 장소다.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모든 것을 격리하는 세계는 이미지의 가능성을, 지표로 남겨져 지속되는 미래의 시간마저 삭제해버린다. 끝없이 이어진 사막 한가운데서 웨스 앤더슨은 바깥이 없는 영화의 부재를 직면한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사막에서 폭발하거나(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한 가지 다른 비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안쪽의 이야기와 무대 뒤편에서 연극을 제작하는 극작가와 배우들의 이야기는 형식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구성에서 한 가지 차이를 드러낸다. 웨스 앤더슨은 브로드웨이 극장에 어린아이들을 놔두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들은 사막에 도착한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앤더슨의 아이들은 수평으로 배열된 모형 도시의 표면에 예기치 못한 행위를 불러온다. 그들은 단단한 땅을 파서 어머니의 유골을 묻어두고,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져 물건을 부수기도 한다. 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그들은 견고한 사막을 무너뜨리고 깨트린다. 과거의 기호들이 납작하게 눌어붙은 무대에 변형의 경험을 도입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시간을 모색한다. 무덤을 만들고 장례식을 치르며 과거를 시간에 품고 미래로 향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들의 실천에서 온다. 오기는 그런 아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밋지가 남긴 주소를 받는다. 그는 미래로 움직일 것이다. 유년기의 충동은 영화의 시간을 추동하는 유일한 단서다. 공교롭게도, 1950년대의 아이들이란 1969년생인 웨스 앤더슨에게 부모 세대에 속한다. 앤더슨은 50년대라는 시간에 진입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가 남긴 이야기를 만난다. 그 시대는 앤더슨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지만,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앤더슨은 그 해소되지 않는 이야기를 안고 미래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