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휴가철이다. 여름휴가로 며칠 쉰다는 안내문을 붙여놓은 동네 미용실과 카페도 자주 눈에 띈다. 나도 일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이번 휴가의 테마는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좋아’ 혹은 ‘반자본주의적으로 살아보기’이다. 사실 이 말의 본뜻은 ‘느리고 게으르게 살겠다’는 것이다. 돈이 아닌 시간으로 사치를 부려보기로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해한 플렉스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쓰는 일. 정해진 일과가 아니라 무계획과 비효율 속에서 즐거움 찾기. 이번 휴가 기간 동안 내가 실천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며칠은 서울에서 정주민이 아닌 여행자의 기분을 내며 돌아다녔다. 적당히 익숙하고 좋아하는 동네에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머물러보는 것이다. 낯선 시간에 낯선 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난 화요일 아침 7시30분에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덕수궁 대한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몇몇 부지런한 외국인 여행자와 직장인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시간 그 공간에 목적도 목적지도 없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목적 없는 여행에선 눈과 귀가 밝아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도 살피게 되고 카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평일 오후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광화문의 카페에서 여행책을 읽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동료에게 자신이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과로했는지에 대해 토로했다. 그때 나는 소설가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 산문집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고 있었다. 이런 대목에 오래 눈길을 주며.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해치울 수 있는, 괴테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을 단 1밀리미터도 ‘고양’시키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나면 밤 열한시였고 텅 빈 방송국 주차장에서 차를 빼 강변북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면 열한시 반이었다.” 나를 ‘고양’시킬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날엔 김연수의 여행 산문집 <여행할 권리>를 펼쳤다. “버클리에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삶만 알아내면 된다. 그다음에는 그냥 살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나를 고양시키는 삶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어느덧 휴가가 끝나간다. 빈둥거리다가 인생이 바뀌는 경험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름휴가도 꽤 그럴싸했다. 쫓기지 않으니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휴가 중에도 에디토리얼을 쓰고 있으니. 부디 이 너그러움의 유효기간이 길기를, 다들 여유롭고 즐거운 여름휴가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