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이하 제천영화제)는 큰 위기를 겪었다. 2022년 영화제를 치르는 동안 운영비를 과다지출해 대규모 결손이 났고 이로 인해 사무국 직원들의 임금 체불 사태가 발생하는 등 운영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제천시는 부실 운영의 책임을 물어 조성우 제5대 집행위원장과 장지훈 전 사무국장을 해임하고 영화제 몫으로 할당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존폐 기로에 섰던 제천영화제는 전담 TF팀을 꾸리며 영화제 전반과 내부 조직을 쇄신했다. 그리고 올해 6월 <초록물고기>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음악을 맡은 이동준 음악감독이 제천영화제 6대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개막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동준 집행위원장을 만나 집행위원장 임명의 내막과 8월10일부터 15일까지 정상 개최될 제19회 제천영화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영화제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나.
= 상상 이상으로 바쁘다. 집행위원장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정말 많더라. 제각기 열정이 충만한 사무국 직원들과 끝까지 힘을 다해 영화제 개막을 준비 중이다. 처음 집행위원장 자리를 수락할 때는 예술감독의 업무를 맡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실무가 많다. 영화제를 향해 쏟아지는 여러 이슈에 대응해야 했고, 언론인이나 제천시 공무원들도 자주 만나야 했다. 음악인으로 살 땐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해가는 과정이 생소했지만 이젠 적응했다. 처음엔 예술감독 정도의 일로 생각했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지 공연 기획이나 포스터 디자인 등에서 예술적 성과가 나오면 작곡할 때 이상으로 보람을 느낀다. 평생 음악을 창조하는 아티스트로 살았는데 요즘 행사 기획을 계속하다 보니 마음속에서 새로운 도전 의식이 살아나는 중이다.
- 집행위원장 자리를 수락할 땐 고민이 적지 않았을 듯하다. 어떻게 집행위원장 자리를 수락하게 됐나. 보도된 바에 따르면 제천시의 올해 영화제 개최 계획은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둔, 임시추진 위원회의 비상체제 운영이었다.
= 올해 1월 초 영화제 집행위원과 영화계 관계자들이 나를 집행위원장 자리에 추대했다. 당시 이미 전임 집행위원장이 해임된 상태라 집행위원장 없이 영화제를 운영하는 것이 그분들 입장에선 큰 사고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제의를 받은 후 고심하며 이 자리를 맡아야 하는 명분을 찾았다. 우리 영화제는 음악영화제다. 음악영화제의 정체성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감독인 나였다. 결정을 내린 후 사무국이 제천시에 집행위원장 추대 건을 전했는데, 그즈음 제천시가 영화제 임시추진위원회 발족 결정을 내렸다. 제천시의 결정과 사무국의 결정이 거의 동시기에 이루어졌는데, 내 임명 확정 건이 훨씬 나중에 보도되며 여러 말이 나온 셈이다. 영화제를 살리기 위해선 집행위원장 자리가 공석일 수 없으니 영화계 인사들과 제천시 관계자들이 시의회를 설득한 것으로 안다.
- 2013년에 제천영화음악상을 받았고, 2021년엔 제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제천영화제와의 인연이 집행위원장직을 수락하는 데도 영향을 줬나.
= 물론이다. 여름이면 제천영화제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내게 제천은 집 같은 곳이다. 그동안은 제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면, 이제는 내가 손수 제천에 손님을 모셔야 한다. 영화제 실무자로 업무에 뛰어들면서 시야가 많이 확장됐다. 긴 세월 동안 외부자의 입장에서 바라봤던 제천영화제의 개선 방안을 올해부터 내부에서 하나씩 다잡아나가려 한다.
- 집행위원장으로서 그리는 올해 영화제의 큰 그림이 있나. 서울과 제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선 그간 불거진 예산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던데.
= 휴양 도시인 제천의 이미지에 맞는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이에 걸맞은 영화와 공연을 준비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그리는 청사진은 하이테크(high tech)가 도입된 영화제다. 음악영화제는 영화와 음악을 동시에 건드릴 수 있는 인프라의 확보가 중요하다. 이때 첨단기술이 조금만 뒷받침되면 제천영화제를 이루는 양축을 동시에 부각할 수 있다. 가령 제천 청풍호에서 진행하는 개막식이나 여러 공연 등이 제천 시내에 거주하는 제천 시민들에게도 생중계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예산 문제 등으로 엄두를 낼 수 없지만 음악과 영화가 공생할 수 있는 영화제로 키워나가는 것이 나의 궁극적 바람이다. 가본 적은 없지만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영화제의 운영 형태도 많이 참고해보려 한다.
- 2023년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는 작고한 류이치 사카모토다. 그를 추모하는 공연도 올해 영화제에서 열릴 예정인데 류이치 사카모토에 얽힌 기억이 있나.
= 1998년 그가 내한했을 당시 만난 적 있다. 당시 류이치 형님에게 내가 작업한 <은행나무 침대>의 사인 CD를 선물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 즈음, 친한 사진가 선배가 뉴욕에 있는 류이치의 작업실에 방문했다가 그의 음반 컬렉션 정중앙에 내 사인 CD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제보해줬다. 그 소식을 듣고 꼭 다시 뵙고 밥 한끼 먹자는 말을 전했는데…. 류이치 사카모토는 음악적인 면부터 음악을 대하는 태도까지 내게 많은 영감을 준 아티스트다. 올해 영화제에 음악상의 대리 수상자이자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딸인 뮤지션 미우 사카모토가 온다. 그는 심사 중간 관객과의 만남 행사도 가질 예정이다.
- 이번 상영작 중에서 개인적인 추천작이 있다면.
= 폐막작 <블루 자이언트>다. 영화를 보며 두번 정도 눈물을 글썽였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영화라 재즈의 언어를 잘 아는 관객이라면 더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빤할 수 있는 스토리를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통해 변주한 점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