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바다에서 포토그래퍼 정후(우지현)는 허락 없이 찍은 자기 사진을 지워달라는 여자 영(옥자연)의 말에 머뭇댄다. 사진 속 영의 뒷모습이 죽은 엄마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실랑이가 대화의 물꼬를 터주고 일본에서 살다 와 지낼 곳이 없던 영이 정후의 캠핑카에 머물면서 남녀는 연인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불거지고 사진에 관심이 생긴 영이 유명 사진가이자 정후가 연을 끊은 그의 아버지(이상일)와 교류하면서 둘의 관계는 냉각된다.
<유령 이미지>란 제목으로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소개된 영화가 <너의 순간>으로 제목을 바꾸어 개봉한다. 사진이라는 소재를 부지런히 활용하는 작품이다. 극 중 사진은 흐릿한 과거와 공허한 현재를, 단절된 부모와 결핍한 자식을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 자신의 비밀을 봉인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사진에 대한 관점 차이로 캐릭터의 성격과 위태한 연인 관계를 표현하는 점이 흥미롭다. 모든 걸 통제한 순간을 담는 정후와 일상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은 멀어지는 사이를 붙잡는 대신 자기 상처에 골몰하기를 택한다. 해석하는 일을 멈추고 그저 작품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을 흡수하고 싶어지는 영화다. 두 주인공이 캠핑카를 타고 인적 드문 곳을 유랑하는 이 정적인 로드 무비는 먹고 읽고 찍는 일 위주의 단순한 생활상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노을빛에 물든 바다, 울창한 대나무 숲 등 자연 풍경을 넉넉히 담아낸다. 끊임없는 파도 소리와 카메라 작동 소리, 이따금 시작되는 시를 읊는 듯한 내레이션이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긴장을 이완시킨다.
실제 사진가인 정후 아버지 역의 이상일 작가가 수백장의 사진을 늘어놓고 살펴보는 일련의 후반 장면은 자체로도 인상적이며 영화를 내내 떠돌던 고독과 상실을 한데 모아 감정적 깊이를 더한다. 다만 ‘영’ 캐릭터는 아쉽다. 사진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기 서사를 얻고 옥자연 배우가 통통 튀는 연기로 개성을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영은 남성주인공의 상처에 입김을 불어주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에 존재 목적이 있는 환상 속의 여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