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씨네21>을 3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그새 이준혁은 비리 경찰 주성철로 분한 주연작 <범죄도시3>로 또 한번 천만 배우가 됐다. 배우 고유의 다정한 성정으로, 시네필적 영화 사랑으로, 그리고 변치 않는 자기 관리 능력으로 영화 홍보를 위해 출연한 방송마다 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준혁은 씨네21 X 셀럽챔프가 뽑은 2023년 상반기 최고의 셀러브리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지난 몇달간 세상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 속에서 바삐 보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인 이준혁은 “팬들에게 무척 고맙다”라며 배우 데뷔 이래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남긴 2023년 상반기를 갈무리해주었다.
- <신과 함께> 연작으로 쌍천만 관객 동원의 기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주연작으로 천만 관객의 기록을 갖는 기분은 남다를 듯하다.
= 한동안 주연 히트작이 적었던 터라 히트작을 갖고 싶었다. 여러 작품을 오가며 배우로서 하고 싶은 작품은 대부분 거쳤고 각 작품이 내게 남긴 의의도 컸지만 흥행작을 향한 열망이 있었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 속 마이클 조던이 고된 농구 경기에서 성과를 거둔 후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배를 드는 기분이 궁금했달까. 그러던 차에 <범죄도시 3>의 흥행을 마주하게 돼 무척 다행이라 생각했다.
- ‘기쁘다’가 아닌 ‘다행이다’란 기분이 들었다니 흥미롭다.
= 조던은 나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 경기 끝에 기쁨을 느꼈을 것이고, 내 경우엔 나도 우리 팀도 원하던 결과를 얻게 돼 다행이란 마음이 먼저 든 것이다. 솔직히 <범죄도시3>팀에서 마이클 조던을 꼽으라면 마동석 선배겠지. 나는 데니스 로드먼 정도만 돼도 좋겠다. (웃음)
- 배우로서 <범죄도시3>를 촬영할 때의 감상과 완성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감상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르던가.
= <범죄도시3>는 관객이 원하는 걸 선사하는 영화다. 관객의 반응을 보며 지금의 관객이 무얼 원하는지 느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중년의 배우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상정했다. 극 중 주성철이 나이도 많고 연기를 위해 살도 많이 찌우다 보니 이 작품을 계기로 중년 나잇대의 배역으로 진입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무대인사를 돌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생각했던 앞으로의 진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슈가 됐다. 주성철이 비주얼적으로 호감인 캐릭터가 아닌데!
- 촬영 들어가기 전 캐릭터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자연인 이준혁의 시각을 대입하는 편인가.
= 먼저 관객의 자리에 나를 놓는 편이다. 관객이 내 작품의 장르와 방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려하며 캐릭터에 접근한다. <범죄도시3>는 관객이 이 장르에서 기대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하되 그 안에서 신선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공급자의 입장에서 먼저 고려하는 셈이다.
= 나 역시 관객이고 업계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소비자로 살아온 시간이 길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뜻대로 안될 확률이 90%다. 연기는 그 10%의 적은 가능성 속에서 어떻게든 나만의 것을 20%까지 확장해보려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올 상반기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멜로는 안 하세요?” 아니었나. 생각해보면 <그 해 우리는>은 특별출연만으로 드라마 이슈 키워드 1위를 했고, <시를 잊은 그대에게>나 <한여름의 추억> 같은 작품들도 있다. 그런데 팬들이 원하는 이준혁의 멜로는 ‘이준혁이 울면서 바닥을 기는 피폐한 멜로’,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이준혁이 나오는 멜로’더라.
= 그런가. 현실 연애와 달달한 연애 사이를 균형 있게 오가는 것이 멜로의 중요한 착점이란 생각을 한다. 요새 멜로영화가 귀하지 않나. 근작 중 좋아했던 멜로영화를 생각해보면 <콜드 워>(2018)가 떠오른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까지 끌어들여야 두 남녀가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전쟁이 없는 현실에선 남녀의 사랑을 이어가게 하는 묘안이 없을까. 영화 팬으로서 멜로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도전한다고 해서 이 장르가 부활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웃음)
- 배우 이준혁이 좋아하는 영화와 관객 이준혁이 좋아하는 영화 사이를 가늠해보기도 하나.
=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포함해 톰 크루즈의 영화는 직업 배우로서 탄복하게 된다. 톰 형처럼 동종의 일을 꾸준히 오래 지속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예술성을 존경한다. 반면 관객 이준혁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같은 영화를 무척 재밌어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없다. 나는 아리 애스터의 세계에 출연이 불가능한 배우고 내가 출연하는 걸 관객이 반기지도 않을 것이다. (웃음)
- 올해 <씨네21>과 만났을 때 <사우스포> 덕분에 권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람한 영화가 이준혁의 일상에 침투하는 순간도 많을 듯하다.
= 오히려 일상보다 영화가 더 크다. 평론가처럼 영화를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평균 예닐곱편은 본다. 영화와 일상을 분리하기가 어려운데 심지어 근무지도 미디어 업계다 보니 어느 순간 혼란이 왔다. 생산자와 수용자를 겸하는 삶 속에 스스로가 양식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 어떤 점에서 스스로가 양식화된다고 느꼈나.
= 점점 영화가 즉각적으로 내 일에 영향을 주는 것의 의미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크리스천 베일을 좋아해 <적도의 남자>에선 극적인 감량도, <범죄도시3>에선 극적인 증량도 해봤다. 제이크 질런홀을 좋아해 권투도 시작했다. 그런데 연기 경력이 쌓일수록 누구를 닮아갈 새 없이 나 스스로를 연기의 근간에 둬야 하는 순간들이 온다. 행보를 닮아가고 싶던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들은 존재 자체가 영화가 되어버리며 따라잡을 수 없이 위대해졌고. 지척에서 영감을 줄 만한 이들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나는 누굴 닮아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티모테 샬라메를 따라갈 수는 없지 않나. 요즘은 내가 자양분이 돼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에 관해 고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좋은 영화를 계속해볼 수밖에 없다. 대신 나 스스로가 중심에 서려 한다. 이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걸 안다. 영화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의 필요성을 자주 느끼는 중이다.
- <야구소녀>의 코치 진태는 수인에게 신체적 약점을 극복할 무기인 너클볼을 익히도록 돕는다. 배우 이준혁의 너클볼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 나란 사람은 너클볼과 닮아 있다. 나는 이분법을 선호하지 않고 어디서든 융통성을 발휘하려 노력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크게 동요하지 않고 여러 변화를 수용하려 한다. <엘리멘탈>의 웨이드처럼 말이다. 영화 취향도 그렇다. 나는 영화를 두루 좋아하다 보니 관람작을 엄선하기보다 많은 편수의 작품을 보길 선호한다. 만약 내가 선호하지 않는 특정 사조의 영화가 유행해도 그 현상 자체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변수가 많은 촬영 현장에서도 이런 성향을 쭉 유지하고 싶다.
- 영화를 보는 방식도 나이에 따라 달라지나.
= 한때는 어떤 영화든 무조건 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당시 인도에 일을 도우러 출장 갔다 시내 영화관에서 4시간짜리 영화를 본 경험이 있다. 나와 인도인 커플 딱 3명만 상영관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도 나가버려 혼자 4시간을 봤다. 심지어 발리우드영화를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춤 한번 안 추고 4시간이 이어지더라. (웃음) 이젠 그런 사명감은 없다.
- 인터뷰마다 매 촬영이 괴롭지만 연기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자주 한다.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데 노력과 고역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나.
= 나는 몹시 내향적인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기어코 이 일을 해낸다는 데서 노동의 의미를 찾는다. 솔직히 말해 밖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에서 편안히 피자 먹으며 영화 보는 걸 훨씬 선호한다. 나처럼 집 안에서 충만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 모든 즐거움을 버리면서까지 촬영 현장에 나간다는 건 이 일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콜드 워>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러 대내외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지 않나.
- 스스로를 얼리 어답터라고 칭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떤 새로운 문물이나 상황을 접하면 우선 시도해보는 종류의 사람인가.
= 그렇다. 그렇지만 인사이더들의 얼리 어답팅과는 결이 다른 것 같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빨리 습득하길 선호한다. 오픈런을 해야 하는 화제의 맛집은 안 궁금해도 요즘 뜨는 A.I와 언리얼 엔진은 궁금하다. 실제로 새로운 언리얼 엔진이 나왔을 때 유튜브 튜토리얼을 봐가며 캐릭터가 총을 쏘는 모션까지 구현해본 적 있는데, 그 이상은 어렵더라.
-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마음이 간다고 말한 적 있다. 세상에 남겨야 할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믿는가.
= <삼국지>가 왜 유비의 서사일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조조나 손권의 입장에서 풀어낸 버전도 있지만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유비를 중심으로 풀어낸 이야기다. 그런데 내게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나라도 아이에게 인덕과 신의를 갖춘 유비가 주인공인 <삼국지>를 읽힐 것 같다. 후대에 단 하나의 가치를 전해야 한다면 조조의 이야기가 전승되는 건 끔찍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내가 단 하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길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