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거룩한 술꾼의 전설’, 세속과 신비를 섞어내는 포도주
2023-08-30
글 : 이우빈

다리 밑에서 삶을 꾸리는 부랑자 안드레아스(륏허르 하우어르)에게 한 노신사가 200프랑을 적선한다. 대신 여유가 될 때 성당으로 가서 성녀 소화 데레사에게 헌금으로 빚을 갚으란 조건을 내건다. 안드레아스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얻은 돈으로 행색을 꾸려 도시로 나가고, 이내 자잘한 일자리를 얻거나 예전 친구를 만나면서 기쁜 일상을 채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기적들이지만, 안드레아스의 삶은 점차 풍만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우연히 과거의 연인과 재회하고, 그가 왜 부랑자의 삶을 택해야 했는지에 대한 아픈 과거를 회상하며 침체한다. 가장 큰 문제는 술이다. 그는 음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소화 데레사에게 돈 갚는 일에 자꾸만 실패한다.

1978년 <나막신 나무>로 3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본작으로 1988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이탈리아 거장 에르만노 올미의 후반기 작품이다. 공개된 지 35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개봉한다. 기본적으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색채가 느껴지는 절제된 연기, 삶의 바닥에 맞닿은 이야기와 화면 구도의 현실성이 두드러진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여유롭고 컷 구성도 간결하다. 최근 영화와 비교하자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무척이나 마술적이고 초월적인 순간들까지 무리 없이 그려낸다. 성녀 소화 데레사라는 초현실적 존재의 이미지가 구원 서사에 결부되어 종종 틈입하고, 안드레아스의 과거를 현시하는 비균질적 플래시백 몽타주도 번번이 개입한다. 이로써 안드레아스가 즐겨 마시는 포도주의 모습이 알코올중독자 부랑자의 즐길 거리인 동시에 아주 성스러운 신의 물방울로도 보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술꾼의 전설>이 지닌 현실성과 초현실성의 혼재를 가장 짙게 표현하는 것은 안드레아스 역을 연기한 륏허르 하우어르의 연기다. <블레이드 러너> 속 레플리칸트(안드로이드)의 리더 로이 베티로 유명한 그의 얼굴과 미묘한 표정 변화는 걸인도 성인도 아닌 한 인간의 미약함과 고뇌를 이질감 없이 소화한다. 무어라 종잡기 어려울 만큼 세속적이되 신비하고, 궁색하되 거룩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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