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관람 내내 여러 꿈을 동시에 꾼 듯한 착각을 부른다. 몽유병에 시달리며 괴기스런 행동을 일삼는 남편 현수(이선균)가 나올 땐 가정 호러인가 싶다가도 현수로 인해 수진(정유미)이 폭주할 땐 오컬트 장르가 난입한다. 부부가 서로를 구하려는 멜로가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와중에 느닷없이 코미디도 끼어든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옥자>의 연출부를 포함해 <신과 함께-인과 연> <버닝>의 스탭까지, 장르와 색채도 모두 상이한 영화를 거친 유재선 감독은 자신의 경로를 입증하듯 여러 요소가 한데 뒤섞인 인상적인 데뷔작 <잠>을 쓰고 연출했다.
- 두 주연배우, 이선균과 정유미가 공통적으로 시나리오가 간결해 좋았다는 말을 전했다.
= 어디선가 영화의 모든 요소는 이야기를 추진해야 한다고 배웠다. 시나리오에서 장면을 묘사할 때도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보다 대사와 지문이 이야기를 앞으로 끌어나가길 바랐다.
- 시나리오를 3고 만에 탈고했다고.
= 초고만 해도 적은 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호러였다. 이야기의 기조는 동일하지만 최종고로 갈수록 형식이 많이 바뀌었다. 고수하려던 설정이 따로 있진 않았다. 오히려 영화가 더 재밌어질 수 있다면 누구의 피드백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 <잠>의 장르는 명확히 호러지만 의외로 러닝타임 내내 소소한 웃음이 터진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호러와 코미디의 결합을 염두에 뒀나.
= 의식적으로 관객을 웃기기 위한 이야기를 쓰거나 연출을 가미하진 않았다. 그런데 단편영화를 만들던 시절부터 코미디에 큰 착점을 안 두어도 영화제에서 내 영화를 코미디 장르로 분류했고, 관객도 연출의 의도와 무관한 장면에서 많이들 웃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나는 황당무계한 상황 속에 캐릭터들이 아등바등하는 스토리를 좋아하고 자주 써왔다. 아이러니 속에서 전력투구하는 캐릭터들을 보면 자연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겠더라.
- 여러 인터뷰에서 마틴 맥도나 감독을 좋아한다고 밝힌 이유가 짐작이 간다.
= 처음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한 작품이 마틴 맥도나의 <킬러들의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킬러들의 도시>와 <잠>의 구도가 비슷해진 것도 같다.
- 영화의 1부에선 몽유병을 앓는 현수가 공포의 존재라면, 2부부터는 현수로 인해 잠을 못 이루는 수진이 더 큰 공포의 존재로 기능한다.
= 몽유병을 앓는 캐릭터만 공포의 존재로 기능한다면 한계가 발생한다. 몽유병을 앓기 위해 밤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 낮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제약을 역이용하면 공포를 선사하는 자리에 구조적으로 수진이 놓일 수밖에 없었다.
- 수진과 현수의 상황을 바꾸는 고민은 안 해보았나. 아내가 몽유병을 앓고 그 광경을 남편이 지켜보는 설정이라든지.
= 시나리오를 쓰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나와 내 아내의 모습을 반영하게 됐다. 내가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입장이고 아내가 그걸 지켜봤던 터라 내 상황을 역전해보고 싶었다.
- 수진은 끝까지 “둘이 함께라면 극복못할 문제는 없다”며 현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영화엔 수진의 아버지가 어릴 적 가정을 떠났다는 설정이 언뜻 스친다. 미루어보면 수진은 가정이 깨지는 것에 원초적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 수진이 함께하는 것의 가치를 맹종하는 이유는 언급한 전사로부터 나왔다. 수진의 눈엔 어머니 (이경진)의 결혼 생활은 실패한 사례로 비쳤을 것이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고 다짐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수진의 낙천성을 보여준다. 결혼만 하면, 부부만 되면 모든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 캐릭터 아닌가. 그런 신념이 흔들릴 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수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작품의 장르성을 살리는 중요한 요소다. 작품을 준비하며 유사한 처지에 놓인 몇쌍의 부부들을 취재했다. 보통 부부 사이에 위협이 생기면 당분간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정답이라 여겨지지 않나. 그런데 내가 만난 모든 부부가 서로 분리되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다들 함께 지내며 대책을 세우는 데 주력하더라.
- 영화 속 공포를 유발하는 기제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비가시적 공포가 서사를 추동하는 영화일수록 호러의 무드 조성이 중요했을 텐데.
= 장르성을 살리기 위해 가장 고심한 지점은 촬영이다. 수진과 현수의 심리를 반영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이 촬영의 제1원칙이었다. 수진을 바라보는 현수의 모습, 현수를 보는 수진의 모습이 효과적으로 담겨야 두 캐릭터가 각기 겪는 공포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거라 믿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일상엔 귀신이 없어도 이미 공포스런 일들이 산재해 있지 않나.
-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인상적이다. 렘수면 행동장애에 관한 수많은 논문이 참고문헌으로 제시된다.
=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제작진이 수면 클리닉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크레딧에 명기된 여러 논문도 탐독했다. 하지만 영화 속 몽유병은 어디까지나 장르적 재미를 위한 허용이 많다. <잠 >을 보고 몽유병의 특성을 재단하면 곤란하다.
- 홍보를 위해 출연한 유튜브 채널 <넌 감독이었어>에서 직접 그린 <잠>의 스토리보드를 공개했다. 매번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의 작업방식이 떠올랐다.
= <잠>을 만들기 전 영화 제작을 학습한 두 곳이 영화 동아리와 봉준호 감독님의 <옥자> 현장이었다. 봉 감독님은 콘티에서 세운 계획을 고스란히 촬영 현장에서 옮기신다. 그래서 영화 연출은 당연히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내면화했는데, 봉 감독님은 천재란 사실을 간과했더라. (웃음) 촬영감독님과 현장편집 기사님이 다행히 여러 촬영의 방식을 제안해주셨고 두 주연배우도 콘티대로 끊어 촬영하는 것보다는 큰 흐름 안에서 연기하길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