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새 좀 봐요.” 새로운 요양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셔온 산드라(레아 세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말한다. 귀여운 새들이 새장 안에 있다. 이 대수롭지 않은 장면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철창 안에서만 날아다닐 수 있는 새들을 통해) 시종 이동하더라도 그 이동의 굴레 자체에 갇혀 있을 삶을 무심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내 보는 산드라의 일상에는 출구가 없다. 그녀는 지금 아버지의 병환, 딸아이의 성장, 뜨겁지만 위태로운 연애 사이에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어느 멋진 아침>의 태도는 부정한 세계가 반복된다는 진실을 비관하는 데 그치기보다, 그 안에서 불쑥 조우하는 기쁨과 슬픔의 디졸브를 기껍게 여기는 편이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처럼 모험을 경유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현실의 재인식에 교훈을 두는 서사는 이제 흔해졌다. 희비를 수용하는 일은 판타지로의 도피 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한가운데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어느 멋진 아침>은 역설한다.
그래서 <어느 멋진 아침>은 계절이 변화하는 동안 산드라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따라간다. 서사는 느슨하고, 상황과 행위와 정서는 비슷하게 반복되어 장면들의 순서가 헷갈리기 십상이다. 일상의 되풀이는 경과적이면서도 영구적이다. 수많은 교통수단을 통해 움직이지만 죽음 전까지는 생이라는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 모네의 <수련>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그 장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이라는 몸을 떨칠 수 없듯이. 이곳에서 그림에 집중하기보다 서로를 번갈아보던 산드라와 클레망은 미술관 앞 정원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이렇게라도 이들은 밖을 배회해야 하는 걸까? 길을 잃은 듯 헤매는 산드라, 고요하게 앞을 살피는 클레망, 이 장면은 짧게나마 섬 한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비가시의 긴장은 곧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서로를 발견하고 포옹한 연인은 다음 장면에서 다시 집으로 가, 가장 안쪽의 가구인 침대에 눕는다. 투병, 수면(혹은 불면), 성애의 공간. 침묵하면서 깨어 있어야 하는 장소로서 침대는 ‘이동의 영화’인 <어느 멋진 아침>의 다중적 면모를 끌어당기는 구심점이다.
아내와 애인을 오고 가는 남자 클레망을 위시하여 산드라의 현재는 왕복과 연루된다. 바깥을 상상하던 영화들이 으레 보여주었듯, <어느 멋진 아침>은 이동의 모티프를 틈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문과 벽의 관계를 그린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산드라가 아버지의 집 앞 에 도착할 때, 열쇠를 가진 이는 아버지이지만 하나하나 설명을 통해 실질적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이는 산드라다. 거듭하며 기다려야 열리는 문은 겨우 한소끔의 인사 정도를 허락할 뿐이지만, 일상은 이 아이러니한 역할의 역전, 그로 인한 쉼 없는 등퇴장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문을 드나드는 행위를 통해 정착하지 못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리던 필리프 가렐의 <질투>처럼, 영화에서 분주한 이동성이란 생명력의 환기보다 불안을 유폐하려는 진동에 가깝다. 물론 둘의 거리가 멀진 않지만.
우는 여자의 느린 시계
<어느 멋진 아침>의 특기할 지점 중 하나는 영화를 메우는 산드라의 눈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먹거리는 그녀의 우울감이 눈에 띈 이유는 또 다른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 속 주인공이 스쳤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여자는 뚜벅뚜벅 목적지를 향해 걷다가도 일순간 닥치는 고통에 유약하게 휩싸이곤 했다. 다르덴은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건강이라는 ‘정상성’이, 앓는 인간과 대치하는 상황을 그리면서, 그렇다면 자주 우는 여자가 과연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쟁점으로 살핀다. 이연숙 비평가는 “슬픈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그가 슬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비약”을 언급하며 “그는(…) 슬퍼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슬픔을 “관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특히 여성)에게 주체성을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무엇보다 그 방식을 닮은 서사의 오점을 환기한다. 우는 여자라면 또 한번 레아 세두가 출연한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가 있다. 여기서도 그녀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다만 프랑스(레아 세두)의 눈물은 거의 맥락이 제공되지 않는 일종의 기습적 사태다. 서사적 배경이 제시될 때조차 화면은 그녀의 눈물을 이상한 각도나 맥락으로 재조립한다. 뒤몽은 작금의 포화하는 미디어 세계에서 눈물이라는 기표가 난데없이 주어질 때 그것의 진실된 정동을 파악하는 게 가능한지 시험한다. 그러나 <어느 멋진 아침>에서 산드라의 눈물은 정직하리만치, 행불행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적 결과이며 현상이다.
개별 숏에 빼곡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미아 한센러브도 <어느 멋진 아침>에서는 액자 하나를 끼워넣는다.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장면은 언제 병원에 도착했을지 모를 산드라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을 재생할 때다. 늙은 여성이 병실을 착각해 걸어 들어오고, 산드라는 그녀를 배웅한 뒤 의자로 문을 막아둔다. 곡을 따라 허밍하던 아버지가 음악의 무게에 힘들어하자 산드라는 오디오를 끄고 그와 테라스로 외출한다. 날이 추워 얼마 못 걸은 그들은 다시 실내로 들어온다. 이후 홀로 버스에 앉은 산드라의 뒷모습과 함께 아까의 소나타가 논다이제틱 사운드로 이어져 울려퍼진다. 눈물음형으로 이뤄진 선율이 산드라의 슬픔을 공유한다. 이 장면의 연속은 마치 음악으로 묶인 괄호, 숏으로 연장된 슬러 같다. 세계 안의 음악이 우릴 잠수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곧장 멈출 수 있다. 다만 생을 관장하는 시계는 그 무거운 음악을 기어코 다시 불러낸다. 공교롭게도 소나타는 2악장이다. 2악장이란 대개 오늘날 대중이 감각하는 타임라인에 비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느릿한 호흡으로 구성된다(게다가 영화는 날카롭게 고조되는 경과부는 배제했다). 그러나 한곡의 전부를 노정하기 위해서는 이 무거운 시간을 통과해야만 한다. 소나타가 개별 곡뿐만 아닌 형식을 가리키는 동음이의어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한다.
산드라가 경험하는 시간은 충동적으로 외삽된 ‘사건’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 앞에 가련하게 놓여 있고 앞으로도 차례로 거둬야 하는 ‘일상’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적 ‘생활’과 다르게 일상의 감정적 시계는 우리를 반복이라는 권태 속에서 느긋하게 째깍거리게 한다. 그러나 언젠가 돌아본 시간은 급속한 도약을 이룰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옷을 입고 있던 산드라는 이탈리아에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어느새 가벼운 복장을 하고 화창한 햇빛 아래 서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프리즈 프레임으로 산드라의 어느 멋진 아침을 동결한다. 드넓은 전망이 근사하게 보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