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내 사랑 샐리' 배우 에스더 리우, 여성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업에 사명감을 느낀다
2023-10-16
글 : 정재현
사진 : 최성열

유품언으로도 알려져 있는 에스더 리우는 2003년 대만의 걸그룹 스위티로 데뷔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가수로 데뷔한 해에 드라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통해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선검기협전> <나의 귀여운 시어머니> <미래마마> 등 드라마에서 자기 앞의 생을 명확히 인지하고 힘차게 걸어나가는 여성을 열연한 에스더 리우는 넷플릭스 시리즈 <화등초상>의 ‘하나’ 역으로 대만을 넘어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에스더 리우는 올해 영화 <내 사랑 샐리>로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그간 우수에 젖은 대만 도시 여성을 주로 연기했던 에스더 리우는 이번 작품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시골 양계장 살림에 여념이 없는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 휘준을 연기한다. 하나뿐인 남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던 휘준은 “범띠 여자는 대가 세 새신랑의 기를 꺾는다”라는 무당의 점지에 따라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에 처한다. 이때 조카의 제안으로 휘준은 온라인 데이팅 앱을 설치하고,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 중인 프랑스 남자 마르탱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다. 휘준은 마을에선 닭집 노처녀지만 데이팅 앱과 마르탱에게만큼은 ‘내 사랑 샐리’가 된다. 자신을 위해 돈 한푼 써본 일 없던 휘준은 마르탱을 만나기 위해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축하한다.

=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났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오직 감사한 마음뿐이다. 팬들도 20년씩 곁을 지켜주었고, 함께 일하는 스탭들도 대부분 10년이 넘은 분들이다. 이번 부산영화제에 대만 팬들이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찾아와주었다. 원래 함께 영화도 볼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여의치 않아 팬들과 호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 부산 체류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을 들려준다면.

= 단연 음식이다. 어딜 여행하든 그날의 끼니를 정하는 일이 내겐 무척 중요하다. (웃음) 직접 검색해둔 맛집과 지인들에게 추천받은 정보를 총동원해 부산에 오기 전부터 식당을 전부 예약 해뒀다. 한우도 먹고 삼계탕도 맛있게 먹었다. 심지어 간장게장은 여러 번 먹었다.

- <내 사랑 샐리> 속 휘준과 당신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 나는 평생 도시에서만 살았던 터라 닭을 키우며 농부의 삶을 사는 휘준을 연기하는 것이 재밌었다. 공교롭게 나도 휘준처럼 30대를 넘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고, 프랑스 출장 중 새로운 자아를 찾기도 했다. 휘준으로 몇달을 살다 보니 점점 휘준이 나인지 내가 휘준인지 헷갈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 순간을 겪은 뒤 오히려 휘준에게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나.

= 데뷔 후 업무차 프랑스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출국 전 공항에서 팬들과 간단한 팬미팅도 하고 기자회견도 마쳤는데 파리에 갔더니 나를 아는 사람이 정말 한명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내가 어떤 삶을 살길 원하는지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고 나의 새로운 자아를 깨우쳤다.

- <내 사랑 샐리> 촬영 현장은 닭, 강아지 등 수많은 동물 배우들이 가득한 현장이기도 했다. 닭과 강아지를 사랑하는 휘준을 연기하기 위해 동물들과 친해지는 순간도 가졌나. 가장 좋아하는 동물로 강아지를 꼽기도 했던데.

= 휘준이 사는 집 세트에만 60마리의 닭이 있었고, 촬영 현장에는 무려 800마리의 닭들이 상주했다. 촬영 막판에는 닭들이 내 말을 이해하고 대화도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중반 태풍으로 인해 양계장이 무너져 닭들이 폐사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닭들의 사체는 모형이었지만 실제 그 장면을 찍을 때 감독님이 차마 세트 안으로 못 들어오셨다. 현장에서도 아침마다 닭들에게 사료를 먹이고 놀다 보니 감정 이입이 절로 된 것 같았다. 극 중 반려견으로 나오는 강아지의 이름이 고구마 아닌가. 사실 그 친구의 본명은 늘 꼬리를 팔랑대며 촬영장을 활보해서 ‘꼬리꼬리’였다. 그런데 나한테 계속 고구마라고 불리다 보니 나중엔 고구마라 불러야 돌아보더라. (웃음)

- 휘준에게 온전히 시공간을 내어주는 촬영이 인상적이다. 배우로선 어땠나.

= 사실 처음엔 휘준이 자기를 꾸밀 새 없이 시골에만 사는 여성이다 보니 메이크업도 못하고 촬영하겠구나 싶은 걱정이 있었다. 영화의 프리미어 상영 때도 무척 놀랐다. “내 얼굴 왜 이렇게 크게 나와!” 하고 놀라며 말이다. 클로즈업숏도 꽤 많은 영화 아닌가. 오로지 감독님에게 의지해 각 장면을 완성했다.

- 휘준이 온라인 데이팅 앱으로 마르탱을 만났을 때 모두들 로맨스 스캠(SNS나 메신저 등으로 신분을 사칭하고 불특정 이성에게 접근해 금전을 요구하는 사기 수법)일 것이라며 말린다. 하지만 자신을 믿는 마르탱을 향해 사랑을 강행하는 휘준을 보면 누구와도 내밀한 소통을 경험한 적 없는 외로운 사람으로 보여 안타까움이 든다.

= 휘준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해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 문화권 자체가 서구 문화권에 비해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서툴지 않나. 휘준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유일한 존재는 닭이다. 그래서 마르탱처럼 생면부지의 남성이 고백해올 때 순간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삶이 각박하면 맹목적으로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지 않나. 휘준에겐 그런 존재가 마르탱이었을 거다.

- 휘준은 마을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미신을 맹신하는 고모에 의해 동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뻔한다. 부조리한 상황이 닥쳐도 휘준은 저항보다 인내를 택한다.

= 본상영판엔 많이 편집됐는데 휘준에 관한 전사가 있다. 사고로 부모를 일찍 여읜 휘준은 어린 남동생의 실질적 보호자였다. 그런 휘준을 지켜준 존재가 고모다. 가족이란 존재가 그런 것 같다. 서로 쓴소리를 주고받지만 사실 그 안엔 사랑이 숨어 있고, 구박처럼 들리는 말에도 관심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휘준은 고모와 티격태격해도 죽이 잘 맞는다.

- 영화제 기간 중 GV에서 관객들로부터 받았던 질문이나 감상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 “예쁘다”, “연기 잘한다”와 같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한국 관객들이 심도 있는 질문을 많이 해서 행복했다. 감독님이 한국 관객에게 받았다는 피드백이 기억에 남는다. 30대 여성 관객이 우리 영화를 보고 본인도 또 새로운 자신을 찾아나서고 싶다는 감상을 전했다고 한다. 출연자로서 무척 뿌듯했다.

- 2013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상식인 금종상에서 드라마 <폴링>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 작품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해준다면.

= 내가 연기한 질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여자다. <폴링>은 그런 질이 스스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고민해본 적 없이 가족에게 속박된 채 살아가는 리우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도 여성의 자아 찾기가 중요한 테마였다.

- 스스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내러티브에 관심이 많나.

= 확실히 <폴링> 이후로 배우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성을 위한 각종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그리고 여성들의 욕망을 다룬 드라마 <화등초상>까지 만나게 됐다. 지금 현대 여성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업에 사명감을 느낀다.

- 넷플릭스 시리즈 <화등초상>의 하나로 당신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많을 것 같다.

= <화등초상>의 하나는 지금껏 내가 맡았던 역할과 정반대여서 촬영이 끝난 후에도 감정의 여파가 오래간 캐릭터다. 정말 출퇴근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연기한 배역이다. 비밀을 하나 밝히겠다. 작중 등장하는 술들은 사실 모두 우롱차였다. (웃음)

- 지난 몇년간 등장한 한국의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에서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허우 샤오시엔 등 대만 뉴웨이브 기수들의 흔적이 공통 경향으로 드러난 적이 있다. 한국의 신인감독들과 비슷한 연령대인 당신에게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은 어떻게 기억되나.

= 언급한 감독들은 대만 사람들의 마음에 평생 살아 있는 이름들일 것이다. TV에서도 심심찮게 세 감독의 영화를 틀어주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만 사람들 모두는 세 감독의 자장 아래 영화에 눈을 떴을 것이다. 배우가 되어 이들 감독의 영화를 떠올려보면 동종 업계에 위대한 감독들이 존재했거나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이 고마울 따름이다.

- 2000년대가 넘어가며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대만영화는 <말할 수 없는 비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상견니> 등 청춘 로맨스물에 치우쳐 있다. 한국 관객들이 아직 접하지 못한 대만영화 중 추천작이 있나.

= 요즘 대만영화계도 한국영화만큼 다양한 시도를 해나가는 중이다. 올해 나온 작품 중에선 <돼지, 뱀 그리고 비둘기>(2023)를 추천한다. 대만의 전통문화와 액션 장르가 결합한 아주 독특한 영화인데 한국 관객들도 빨리 만나보길 바란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