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은 처음엔 주황색이었다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가 그리고 보라색, 파란색이 돼요.” 데뷔작 <버닝>에서 전종서가 분한 해미의 대사는 이후 배우 전종서의 행보를 선언하는 문장으로도 손색없다. 전종서가 스크린과 TV에서 연기한 캐릭터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스크린이라는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투수 전종서가 작정해 던진 수많은 직구들을 관객들은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변화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을이 돼 천변만화의 필모그래피를 폭주하던 전종서는 <발레리나>의 옥주를 만났다. 혈혈단신 친구 민희(박유림)의 복수혈전에 나서는 옥주는 전종서의 어떤 캐릭터보다도 묵묵하고 묵직한 여자다. 전종서 또한 <발레리나>가 배우 인생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옥주가 주인공인 것에 비해 옥주에게 친절한 서사는 아니다. 옥주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두세 차례 매장에서 무언가를 구매할 때뿐이다.
= 옥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옥주는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면 회까닥 돌아버리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 성질을 억누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관객들이 궁금해하길 바랐다. 옥주가 워낙 말수도 없지 않나. 그래서 나도 옥주를 발산하기보다는 억제하고 눌러가며 표현해보았다.
- 배우로서는 설명이 모호한 옥주에게 어떻게 다가갔나.
= 전사를 쓰진 않았다. 전사를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보통은 캐릭터와 나 사이의 접점을 많이 확보해두는 편이다. 나와의 공통점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옥주는 다짜고짜 일을 저지르지만 또 조심스러운 면도 지녔고, 활활 타오르지만 어느 순간 잠식돼 사라져버릴 수 있는 불안감도 흘리는, 양면성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 옥주는 민희에게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게 재밌다는 걸 알게 됐어”라며 마음을 표현한다. 옥주가 민희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지켜내려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 민희는 옥주에게 계산 없이 다가왔다. 옥주가 타인에게 쉽게 동화되는 사람은 아닌데 민희와 스스럼없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민희의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옥주는 일반적인 대인 관계가 낯선 사람이다. 그런 옥주의 삶에 다정히 일과를 물어봐주고 생일도 축하해주는 민희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옥주가 민희보다 더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 옥주는 민희와 같은 색으로 머리카락을 탈색한 후 소위 ‘뿌염’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웃음) 민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해도 되나.
= 민희가 직접 탈색을 해주고 검은 뿌리가 올라올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물론 그러기엔 기장 차이가 있어 리얼리티는 안 살지만 말이다. 실제로 뿌리를 방치하진 않았고, 투 톤으로 염색했다.
- 영화 중반 등장하는 또 다른 성범죄 피해자 여고생(신세휘)은 옥주에게 민희의 대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 옥주는 민희의 복수를 해나가며 소명 의식을 느꼈다. 내가 끝마쳐야 하는 혈전이고, 나만이 완수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끝까지 달렸다. 그러던 중 여고생까지 알게 되니 분노의 불길이 커진 것이다. 신세휘 배우와 연기할 때 정말 재밌었다. 나와 연기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기만으로 토스와 리시브가 너무 잘 이루어져서 꼭 한번 작품으로 재회하고 싶다.
- 옥주를 연기하며 예상 밖의 새로운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나.
= 옥주가 민희의 사체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민희의 성범죄 피해 증거를 발견하고 오토바이를 탄 채 호숫가에서 포효할 때가 그랬다. 내가 옥주라면 그 두 순간 모두 얼어붙은 채 감정을 머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감독님은 옥주가 포효하고 토해내길 바라셨다. 옥주가 감정을 마구 드러내는 것이 과해 보이지는 않을까 내심 우려했는데 완성본을 보니 감독님의 디렉션이 정답이었다.
- 이전에도 액션 연기를 몇 차례 소화했다. <발레리나>의 액션은 다른 작품들과 얼마나 다르다고 자평하나.
= 액션을 하기에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번 작품을 찍을 때도 임계점을 넘기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감정을 밀도 있게 채워넣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무술감독님이 작품을 단순히 액션의 합으로만 규정하지 않으시고 감정 위주로 액션 시퀀스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해주셨다. 사실 <발레리나>를 액션영화라 생각하지 않았다. 옥주는 싸워야 할 이유가 명확하다. 싸움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관객의 감정이 옥주와 함께 고양하길 바랐다.
- <발레리나>에는 두 차례 인상적인 클로즈업 숏이 나온다. 욕조 속 민희를 바라볼 때 그리고 후반부 해변가에서 최 프로(김지훈)을 바라볼 때. 직전 작품인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을 포함해 클로즈업 숏에 담길 때면 배우 본인이 적극적으로 즐기는 듯한 인상이다.
= 클로즈업을 좋아하고 신나한다. 그때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눈빛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충현 감독님이 전작 <콜> 때부터 클로즈업 숏을 많이 쓰시기도 했다.
- 촬영 현장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긴다고 들었다.
=<발레리나>를 찍을 땐 커피를 정말 많이 마셨다. 몸이 안 좋아질 정도로 카페인을 다량 섭취했다. 그런데 최근 드라마 <웨딩 임파서블>을 찍으며 좋아하던 커피를 싹 끊었다. 캐러멜 마키야토, 바닐라라떼 이젠 안 마신다! 커피를 끊고 나니 우선 살이 정말 많이 빠졌다. 다이어트가 자동으로 되더라.
- 지난해 <씨네21>과 만났을 때 <발레리나>는 이제껏 연기했던 작품과 다른 방식으로 연기했다고 귀띔해주었다.
= 취향 문제인데, 만약 내게 배역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면 진심으로 민희를 골랐을 것이다. 민희 캐릭터는 보고만 있어도 재밌는 요소로 가득하지 않나. 평소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를 민희 캐릭터가 많이 가져가길 바랐다. 내가 판을 깔아주면 민희가 더 빛나고 화사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민희는 <발레리나>의 심장이다. 민희가 박동할 수 있도록 나는 옆에서 열심히 펌프질했다.
- 이번 영화에서 삽입곡의 가창자로도 참여했다.
= 나는 힙합과 랩을 사랑한다. 부르진 못하지만 말이다.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변승민 대표의 제안으로 녹음에 참여했고, 그레이 음악감독도 찬성한 것으로 안다. 녹음 과정은 연기와 비슷했다. 음악감독의 디렉팅이 있고 거기에 충실하면 된다. 다음에도 삽입곡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 그런데 음반이 나오거나 음원이 풀리는 건 곤란하다. (웃음)
- 평소 이미지 수집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아카이빙해둔 디자인들을 역으로 연출자에게 제안하기도 하나.
= 보통은 연출의 말을 따르는 편인데 <발레리나>에선 제안을 해보았다. 옥주가 민희의 유서를 발견하는 장면을 찍기 전날 밤 꿈을 꿨다. 그 꿈에서 민희의 유서가 돛단배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그래서 현장에 가서 민희의 유서를 돛단배 모양으로 접으면 어떨까 제안했는데 반영해주셨다.
- <발레리나>에 담긴 배우 전종서가 관객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나.
= 배우로선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발레리나>는 소중한 존재를 잃어본 적 없는 채 찍은 영화다. 그런데 깊은 상실을 경험한 후 완성작을 보니 누군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의 크기를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내게 <발레리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픈 영화다. 시나리오를 읽을 당시부터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관객들도 내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으면 한다. 시적이다가도 불친절하고, 통쾌하다가도 막무가내인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의 배우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