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라는 시그니처 사운드가 영화계로까지 퍼졌다. 10여년간 힙합 음악계의 정상을 지키던 그레이와 <발레리나> 음악감독이란 직함의 싱크로율은 그 결과로 증명됐다. ‘젊고 세련된 감각’이라는 다소 추상적 표현이지만, <발레리나>의 음악과 영상미가 만족시켜준 오감의 말초적 쾌감을 부정하긴 어렵다. 보통의 음악 앨범 작업량까지 웃돌았던 그의 헌신은 15개의 트랙이 꽉 들어찬 O.S.T 앨범의 풍만함에서도 느껴진다.
- <발레리나>에 참여한 계기는.
= 내 음악을 선보인 지 10년쯤 됐다. 새로운 시도로서 영화음악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몇년 전부터 해왔고, 지난해쯤엔 의지가 더 강해져서 회사 대표에게 직접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마침 그 한달 뒤쯤 <발레리나> 영화음악 작업 제안이 들어왔다. 무조건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발레리나>측에서 음악을 제안한 이유는.
= 나도 그게 가장 궁금했다. 이충현 감독님의 전작 <콜>엔 유명한 달파란 음악감독님이 참여하셨는데 다음 작품엔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겠다니까 놀랄 만했다. 첫 미팅 때 감독님과 얘기를 나눠보니 <발레리나>가 연출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모든 요소에서 젊고 세련된 감각을 요하기에 나를 택했다고 설명하시더라. 시나리오만 봐도 감독님이 원하는 세련됨이 명확히 보였고, 내가 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음악 작업을 시작했는지.
=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많은 연습과 공부가 필요했다. 일을 수락한 직후, 지난해 상반기쯤부터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 먼저 캐릭터들을 해석하고 나서 각자의 테마를 구성했다. 그다음엔 <발레리나>의 전체적인 무드에 맞춰 테마곡을 만들었다. 6~7곡을 완성해서 감독님에게 보내려는데,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너무 떨리더라. (웃음) 다행히 반응이 너무 좋았고 그중 2~3곡은 결과물에도 쓰였다. 영화 초반에 무용수들의 대규모 춤 시퀀스가 있다. 처음 보냈던 곡 하나가 그 장면의 안무 제작용 음악으로 쓰였다. 이런 식으로 긴밀하게 영감을 주고받는 일이 무척 신선했다.
- 각 캐릭터의 컨셉을 설명해준다면.
= 최 프로는 외적으론 너무 멋지지만, 그 멋짐을 압도하는 악함이 있다. 그 두 분위기를 공존시 키는 게 중요했다. 혼자 걸어가는 장면에선 강렬한 드럼 베이스의 힙합을 깔아서 쿨함을 강조했다. 혼자 음악을 감상하는 장면에선 고상한 클래식풍의 음악을 틀었다. 악한 인물이지만 취미는 고상하다는 기괴함을 표현했다. 오프닝 시퀀스에 민희가 크게 좌절하는 부분이 있다. 발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오케스트라풍의 전자 음악이 풍겨 나오다가 드비타의 보컬이 더해지면서 힙합, R&B 색채가 혼합된다. 민희의 좌절감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한 아이러니다.
- 주인공 옥주는 어떻게 해석했나.
= 옥주를 민희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했다. 옥주의 액션 장면을 발레리나인 민희가 추는, 구체적으로는 피를 부르는 춤 같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각 음악에 발레의 장 구성에 맞춰 <GRAND PAS DE DEUX>(그랑 파드되) 같은 발레 용어를 붙이기도 했다. 옥주가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음악 제목은 <CODA>다. 기존 발레 용어에 어울리는 굉장히 빠른 템포의 음악을 택했고, 인물들이 정말 춤추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표현했다.
- 영화 중반부쯤엔 음악 사용이 절제된 느낌도 있다. 전체적인 음악 삽입의 흐름을 어떻게 조절했나.
= 처음 가편집본을 받았는데 난생처음 음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의 영화를 본 거다. 참 막막하더라. 이충현 감독님은 전적으로 작업의 자율성을 열어주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천천히 지켜보는 스타일이다. 사실 그게 더 무섭긴 한데…. 덕분에 전체적으로 조금 정리가 됐을 때부터 더 안정적이고 긴밀하게 협업할 수 있었다. 작업실에서 의견을 주고받고 피드백에 따라 즉흥으로 연주한 적도 많았다.
- 주현, 김영옥 배우가 열연하는 중간 부분에선 음악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 무거운 이야기에 계속 시달리다가 잠시 쉬어가는 장면이다.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메이저하고 밝은,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썼다. 와이드숏의 장면이고, 꼭 총잡이들이 대치하고 있는 구도여서 서부극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그래서 음악도 서부 컨트리 음악을 썼다.
- O.S.T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기도 한
= 옥주가 민희의 방에 들어가서 음악을 끄는 부분에서 처음 등장한다. 현악기로 편곡한 버전이다. 발레리나 민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했던 만큼 영화 전체의 테마곡이라고 보면 된다. 옥주가 호숫가에서 절규하는 장면에선 오케스트레이션을 가미해서 웅장하고 규모가 큰 멜로디 테마로 쓰인다. 또 엔딩 크레딧 부분에서는 폴 블랑코의 보컬이 치고 들어오면서 작품의 여운을 갈무리한다. <발레리나>를 볼 때만큼은 마우스나 리모컨을 챙겨서 마지막 음악까지 꼭 듣길 바란다.
- 첫 영화음악 작업을 한 소회는.
= 첫 영화에서 좋은 현장을 경험한 게 행운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감독님뿐 아니라 모든 제작진과의 협업이 원활했고 내가 뛰놀 수 있게끔 완벽한 환경이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대략 반년은 매일매일 작업에 매달렸다. 어떤 날은 3일 동안 작업실에서 못 나오고 일한 적도 있다. 초반부 식료품점에 흐르는 제3세계풍의 음악, 클럽 음악, 케이크 가게의 음악뿐 아니라 게임기 효과음이나 벨소리 등 세세한 소리까지 전부 다 작업했다. 음악 큐시트에 55트랙이 나오더라. 보통 앨범 작업량에 버금가는, 그 이상의 시간과 마음을 할애했다. 그래도 또 도전하고 싶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잘 쓰이고 싶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