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창작자를 닮는다. 존 머스커 감독의 밀도 높은 에너지를 마주해본 이라면, 그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이 활기를 금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칼아츠를 졸업한 뒤 1981년부터 월트디즈니애니메이션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위대한 명탐정 바실>로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했다. 후에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론 클레멘츠 감독과 <인어공주>(1989). <알라딘>(1992). <헤라클레스>(1997). <보물성>(2002), <공주와 개구리>(2009), <모아나>(2016)를 제작했다. 5년 전 공식적으로 디즈니에서 은퇴한 후로 그는 4년 간 공들여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I’m hip>을 발표했다. “나는 힙해”라는 노랫말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시작한 고양이는 시종 느긋한 태도로 자신이 얼마나 삶을 즐기고 있는지 드러낸다. 고양이의 곁을 짧게 스쳐 지나가는 캐릭터까지 짚어 설명하는 그에게선 작품에 대한 열의가 짙게 묻어났다.
- 2012년에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 심사위원장으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그로부터 10여년 만에 BIAF를 찾았다. 명예공로상까지 수상하게 된 소감을 전한다면.
= 정말 감사하고 영광이다. 본사가 미국에 있다 보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주로 미국에서 제작되긴 하지만, 국경을 넘어 전세계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보람이다. 언젠가 내가 떠나더라도 나의 작품은 남아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더없이 큰 행운이다.
- <I’m hip>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디즈니 소속으로 일할 때에도 항상 개인 작업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I’m hip>에 쓰인 노래를 처음 들은 건 30여 년 전이었다. 듣자마자 ‘이건 된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 딱이다’라고 생각했다. 노래에 맞춰 어두운 스토리, 발랄한 스토리 등 다양한 구성을 떠올렸는데 아내가 딱 한마디 조언을 건넸다. “재밌는 걸로 해.” 그렇게 지금의 이야기가 됐다. (웃음) 처음엔 고전적인 방식으로 종이에 직접 작업해 스캔해봤는데 별로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여러 시도를 거쳐 TV페인트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됐는데 결과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35년 간 감독으로서 일했기 때문에 직접 펜을 잡은 건 오랜만이었고, 책도 다시 찾아 읽고 사전 조사도 하며 거의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내가 직접 했다. 작업 기간은 2년 정도 예상했었지만 최종적으로 4년이 걸렸다.
- 작품을 시작할 때 캐릭터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 주인공인 고양이는 어떻게 구상했나.
= 처음엔 수엽이 덥수룩하게 자란 채로 노래를 부르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동물은 어떨까?’ 싶었고 그렇다면 ‘힙한’ 동물이 뭘까 생각해봤는데 고양이가 제격이더라. 개는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네가 날 좋아히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이지 않나. 예전에 <공주와 개구리>를 제작할 때 뉴올리언스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의 운전사가 무척 근사하고 힙한 중년 남성이었다. 완전히 본뜬 건 아니지만 일정 부분 그의 이미지를 따왔다. 내가 설장한 극중 세계관에선 고양이가 인간 무리에 섞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설정이 굉장히 유용했는데 가령 고양이가 갑자기 네 발로 걷고 ‘야옹’하고 울음소리를 낸다거나, 꼬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감정을 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 <인어공주> <알라딘> <모아나> 등 당신의 이전 작품들에도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활용됐다.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시작한 경우가 전에도 있었나. 실제 작업 과정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나.
=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한다. 캐릭터의 감정을 전하고 스토리의 개연성, 그리고 특정 작품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에도 음악의 역할이 크다. 애니메이션 특성상 음악에 맞춰 캐릭터의 움직임을 그릴 때가 많은데 마치 안무를 짜듯 코레오그레피를 하는 것을, 음악과 스토리가 맞물리는 그 순간의 연결고리를 정말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특정 장면에 삽입된 음악이 없어도 관객들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음악은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어공주>에서 에리얼의 목소리와 노래가 없어선 안 될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 4분여의 짧은 러닝 타임 속에서도 고양이가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 처한다. 워낙 여러 사건을 경유하는 터라 개별 신들을 완성할 때마다 작업자로서 여러모로 즐거웠을 듯하다.
= 특히 고양이가 춤추는 신을 그릴 때 정말 즐거웠다. 댄스 장면을 그릴 때 실제 무용가, 안무가를 초빙했다. 그들이 추는 춤 동작대로 캐릭터의 움직임을 만들어갔다. 처음 애니메이션이 시작할 때 고양이가 ‘내 이야기를 시작해볼게요’라는 태도로 분위기를 휘어잡을 때의 제스쳐도 정말 좋다. 첨언하자면 고양이가 만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내 지인들이다. 함께 작업했던 담당자들과 가족, 내게 애니메이션을 가르쳐 준 멘토까지 등장한다. 세보면 120명은 족히 될 것이다. 고양이가 소녀들과 줄넘기를 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자신의 핸드폰 케이스에 담긴 손녀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 두 명의 소녀가 바로 내 손녀들이다. 옆에서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부부는 나의 아들과 며느리고, 며느리의 무릎 위엔 또 다른 여자아이가 앉아있다. 처음 구상할 땐 그 아이가 없었는데 작품을 제작하는 4년 사이에 셋째 손녀딸이 태어나서, 며느리의 무릎 위에 살포시 앉혀보았다. (웃음) 등장한 지인들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니 다들 재밌어하고 감동하더라.
- 애니메이터로서 선호하는 스토리가 있나. <I’m hip>과 <보물성> <알라딘> <헤라클레스> 등의 작업들을 보며 아마도 모험담이 아닐까 짐작해봤다.
= 강렬한 시각적 요소가 담긴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말하자면 실사판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때 최적이라 느끼는 스토리를 택해온 편이다. <알라딘> <인어공주>처럼 최근 실사화된 작품들이 있는데, 내가 제작할 때만 해도 <알라딘> 지니의 움직임이나 <인어공주>의 물 속 세계를 실제로 연출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애니메이선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굳이 따지자면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하기 좋은 스토리를 택한 것이지, 나의 선호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말하긴 어렵다. 나는 SF, 미스터리물,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좋아하고 동화도 좋아한다. 굉장히 강력한 악당이 나오는 서사도 좋아한다. ‘악당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극악무도한 빌런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데에 동의한다.
- 빌런 캐릭터에도 관심이 있다는 게 의외다. 언젠가 빌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 머스커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 강력한 빌런이 등장하는 작품에 관해서도 론 클레멘츠 감독과 메이저 스튜디오를 대상을 계속 아이디어 피칭 중이다. 하지만 소규모로 팀을 꾸려 <I’m hip>을 작업한 것처럼 지금으로선 내가 주도하는 독자적인 프로젝트 형식에 좀 더 흥미가 간다. 현재 6개에 이르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데 이중 어떤 아이디어가 어떤 작품이 될 지는 나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