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개막작은 2023년 칸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초청된 영화제마다 화제를 모은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이다. 사라 바론이 지은 동명의 그래픽 노블이 원작인 <로봇 드림>은, 고독에 인이 박인 뉴요커 개가 반려 로봇을 집으로 들이며 시작한다. 개와 로봇은 동거를 택한 이후 서로의 삶에서 다시 마주하기기 어려울 찬란한 우정을 나누지만, 행복은 우리 모두가 알 듯 스스로 확신하는 순간 증발해버리고 만다. 모종의 사건으로 로봇은 개와 이별하게 된다. 로봇은 기아(棄兒)이자 미아(迷兒)가 되어 우두커니 또 하릴없이 개를 기다린다. 로봇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다시 돌아올 친구를 꿈으로 그리고, 그 꿈은 영사될 때마다 ‘기억을 걷는 시간’이 된다.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과 서면으로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원작의 어떤 점이 당신으로 하여금 영화화하도록 이끌었나.
= 2010년 즈음 원작을 처음 읽고 사랑에 빠졌다. 당시 대사 없는 그래픽 노블을 수집하던 때였는데, 읽는 내내 작품 속 유머와 놀라운 스토리가 나를 즐겁게 했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났다. 아마 머릿속에서 작품을 영상화하며 읽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원작자 사라 바론에게 연락했고 곧바로 영화화 작업에 돌입했다.
- 당신이 실제로 10년간 거주했던 1990년대의 뉴욕이 아닌, 198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도시가 이 작품의 또 다른 프로타고니스트였으면 한다"라는 인터뷰도 어느 매체에서 한 적 있는데 뉴욕이라는 메갈로폴리스가 서사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으면 했나.
= 개와 로봇은 물론, 도시까지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다고 확신한 순간 이 작품을 영화화기로 결심했다. 영화 속 뉴욕은 프로타고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안타고니스트이기도 하다. 뉴욕은 우리를 환영해주는 도시고, 뭐든 가능한 도시지만 동시에 거친 도시지 않나. 또한 정글 같은 뉴욕에서 생존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개와 로봇의 재회를 막는 것도 결국 도시의 규칙 때문이다.
- 로봇과 개의 이별 이후 영화는 <슬라이딩 도어즈>(1998)처럼 두 갈래의 상황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로봇이 공상하는 달콤한 미래가 먼저 나온 후 실제 로봇이 처한 쌉싸름한 현실이 이어 등장한다. 이같은 대비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정서가 있었나.
= <슬라이딩 도어즈>와의 비교라니 무척 흥미롭다. 공상과 현실의 대비는 원작 그래픽 노블에도 이미 등장하는 설정이다. 하지만 원작 속 공상은 현실과 색채를 다르게 해 지금 보이는 그림이 상상의 순간임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우리 영화는 공상을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그림으로 그리며 관객을 놀라게 한다. 솔직히 전업 관객으로서 나는 공상 시퀀스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제목에도 ‘드림’이 들어가는 만큼, 아름다운 공상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관객을 속일 수 없었다. 나에게 시네마란, 잠에서 깬 상태에서도 꿈을 꾸는 행위다. 관객이 <로봇 드림>을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감상했으면 한다.
- 두 주인공인 로봇도 개도 생물학적 성별이 명시되지 않는다. 이 같은 점이 둘의 관계를 우정, 사랑 등 복합적인 관계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둘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는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까.
= 젠더는 지금 전 세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 아닌가. <로봇 드림>에서 둘의 성별은 서로의 관계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다카하타 이사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의 작품이 당신의 작업 방식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 그들이 만든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 작품만 꼽기도 무척 어렵다. <반딧불의 묘>는 언제 떠올려도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고, <이웃집 토토로>는 주제 면에서 <로봇 드림>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일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야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말해 뭐하겠나. 게다가 나는 어린 시절 다카하다 이사오가 연출한 TV 시리즈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등을 보며 자란 세대다. 유년기부터 사랑해온 두 거장은 나의 작품 세계에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들을 따라하려는 견습생일지도 모른다.
- 영화에 관한 레퍼런스가 눈에 밟히는 영화기도 하다. 뉴욕 시네필들이 열광했던 비디오 렌털숍 '킴스 비디오'가 등장하고,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1939)가 두 캐릭터가 공유하는 추억의 교집합으로 제시된다. 또 영화 속 정서를 추동하는 소재가 '기억'이라는 점에서, 두 주인공이 몬탁 해변으로 여행을 떠날 땐 자연히 <이터널 선샤인>(2004)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이같은 작품들이 주요하게 남아있나. 관객들이 더 찾아냈으면 하는 다른 영화의 흔적도 있나.
= 나 또한 감독이기 이전에 시네필인지라 어둑한 극장에서 영화 감상하기를 즐긴다. 따라서 내 영화엔 다른 영화들의 흔적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실제로 킴스 비디오에서 정말 많은 영화를 대여해 봤다. <오즈의 마법사>에 관한 레퍼런스도 명백히 들어있다. 미셸 공드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터널 선샤인>을 언급해 준 것이 반갑다. 공드리가 내 잠재의식을 들여다보는 듯해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웃음) 꿈과 잠재의식을 직관적으로 연결하는 공드리만의 방식도 나의 취향을 자극한다. <로봇 드림>의 스토리가 케이크라면, 그 위엔 휘핑크림이나 생딸기에 비유할 수 있는 영화적 레퍼런스가 많다. 당신에게 힌트를 주자면 <로봇 드림>은 뉴욕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뉴욕 배경 영화를 향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 당신의 파트너이기도 한 유코 하라미와 음악을 배치할 때 가장 중시한 부분은 무엇인가. 특히 삽입곡 중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의 <September>가 중요하게 사용됐다. 이에 관해 당신은 곡에 등장하는 9월21일이 실제 당신의 딸의 생일과 연관 있으며 첫 가사 "Do you remember"가 이 작품 전체 테마와 맞닿는다고 밝혔다.
= 영화 속 음악을 배치할 땐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이미지를 많이 떠올렸다. 영화 속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의 심상을 참조하며 음악을 배치한 것이다. <September>의 가사와 분위기가 영화에 어울릴 것이라 판단해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그리고 언급한 대로 9월21일은 내 딸의 생일이기도 해 이 또한 ‘빙고’였다. 참고로 딸은 칸영화제에서 <로봇 드림>을 보고 굉장히 행복해했다. 이제는 <로봇 드림>이 우리 가족을 떠나 많은 관객들에게 가닿을 수 있길 바란다.
- 당신에게 로봇 친구가 생긴다면, 그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나.
= 영화관도 가고 함께 산책도 하고 미술관에 갈 것이다.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맛집도 찾아가고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할 것이다. 사실 나의 드림 로봇은 아내다. 물론 나도 아내의 드림 로봇이다. (웃음) 누구든 따뜻한 마음만 갖고 있다면 자기만의 드림 로봇을 주위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