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보러 자주 오던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BIAF)에 내 작품이 초청돼서 정말 기쁘다.” 전다현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녕, 우주>는 집을 떠나는 우주와 그를 배웅하러 나온 명경이 기차역에서 기차가 오길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승강장에서 잠시 잠든 명경의 꿈속에선 우주와 함께한 시간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전다현 감독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를 졸업한 뒤 애니메이션 제작사 레드독컬처하우스에 입사해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끊임없이 차기작을 구상 중이던 전다현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다.
- 모녀 관계를 독특하게 묘사했다.
= 엄마의 말에서 시작된 연출이다. 집에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자매가 있다. 어느 날 딸들이 장성해 집을 떠나기 시작하니 엄마가 적적하다고 느끼셨나보다. 내가 쌍둥이인데, 또 다른 쌍둥이 자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라. 우리가 어릴 때 엄마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 본인 역시 그 나이대로 돌아가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딸들이 독립한 뒤론 원래의 나이인 50~60대로 갑자기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보낼 엄마에게 나의 그림으로 응원과 격려를 건네고 싶었다.
- 대학교 졸업 작품이다. 마지막 학생 작품이라 욕심이 났겠다.
= 그렇다. 할 수 있는 건 다해보자 싶었다. 당시 휴학하고 한 애니메이션 회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퇴사한 뒤 2021년 7~8월부터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사실 <안녕, 우주>는 2021년 10월 즈음에 BIAF 단편 제작 지원 사업에 도전했다 떨어진 작품이다. ‘제작 지원 없어도 잘 할 수 있어!’란 마음가짐으로 더 열심히 했다. (웃음) 그해 12월부터 공동으로 작업할 친구를 구했고, 프리 프로덕션과 메인 프로덕션을 동시에 진행했다. 친구가 기차 등의 3D 작업을 맡아주었고 2022년 3~4월에 팀원들을 구해 함께 메인 작업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해서 지난해 11월, 학교에서 무사히 졸업 상영을 마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면 내가 봐도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았구나 싶다. 신마다 배경이 다 달라지고 방 안으로 물이 쏟아지는 장면도 당시엔 큰 도전이었다. 캐릭터 주위로 카메라를 돌리는 연출은 왜 그렇게 자주 넣었는지. 2년 전의 나는 그 연출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웃음)
- 엄마와 딸이 갈등을 빚는 장면에서 물에 잠기는 것처럼 표현한 이유가 있나.
= 두 사람이 다투는 방 안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이 혼란스럽고 불안한 사춘기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레퍼런스로 삼겠다고 의도한 건 아닌데, 당시에 본 작품들에서 은연 중 영향을 받았다. 그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한창 몰아볼 때라 극의 분위기나 화풍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이 묻어난다. <추억의 마니> <이터널 선샤인> 등의 작품에선 물이나 파도가 들이닥치는 신을 참고했다.
- <안녕, 우주>의 작품 설명에는 ‘명경’과 ‘우주’라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정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우주의 이름만 불린다.
=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엄마, 즉 명경의 입장에 더 쉽게 이입할 거라고 여겼다. 딸이 떠난 뒤 남겨진 사람은 결국 엄마니까. 명경이라고 이름을 정해두긴 했지만 누구나 자신을 대입해 볼 수 있길 바라서 일부러 이름이 등장하지 않게끔 했다.
- 기차역은 명경이 우주와의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또 독립한 우주가 명경의 품을 떠나는 장소로 기능한다.
= 그래서 기차역이 배경이 된 애니메이션의 첫 장면, 마지막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계절 중 겨울을 좋아하는데 겨울 특유의 찬 공기가 잘 담겼다는 생각도 들고. 우주가 탄 기차가 출발할 때 엄마가 따라오며 인사하다가 점점 창밖으로 멀어지는 장면은 지금 봐도 울컥한다. 기술적으로도 도전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새벽녘의 푸른 톤이 서서히 사라지는 표현을 처음 해봤기 때문이다. 기차도 제대로 구현될까 싶었는데 친구가 3D 작업을 정말 잘해줘서 여러모로 만족스럽다.
- <안녕, 우주>를 보는 관객들이 어떤 감상을 느꼈으면 하나.
= 이 작품을 보러 오는 성인 관객 중 본가에서 독립해 생활하는 관객들이 상당수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객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또 명경의 감정을 보면서 ‘엄마가 저렇게 느낄 수 있겠구나’ 하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볼 기회가 됐으면 한다.
- 혹시 엄마가 작품을 보셨나.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시던가.
=처음엔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못하셨는데 설명해드리니 ‘이거 내가 했던 얘기구나’ 하시더라. 울컥하실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 없이 엄청 덤덤하게 보셨다. (웃음)
- 장편에 대한 욕심은 없나.
= 물론 있다. 실뱅 쇼메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언젠가 <벨빌의 세 쌍둥이>와 같은 한 끗 다른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는 게 목표다. 사실 올해 초에 장편작 구상을 한 게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목 민족의 전통 복식과 장신구를 묘사하길 선호한다. 그래서 이 부족의 삶을 죽음이란 주제와 엮어 연출해보고 싶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개인 작업을 진행한다는 건 보통 의지로 되는 게 아니더라. 퇴사한 뒤에야 시작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웃음) 그래도 팀원을 잘 꾸리면 5분 내외의 단편 작업은 가능할 것 같아서 고려중이다. BIAF 단편 제작 지원 사업에도 다시 도전해볼 수 있고! 가족 구성원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아빠와 쌍둥이 자매, 그리고 동생이 각각 주인공인 이야기다.
- 가족과 관련된 주제를 계속 다루려는 이유가 있나.
= 가족 관계에서 발생했던 갈등을 외면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당시 가족들의 감정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됐다.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승화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