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거미집>에서 김열 감독(송강호)이 집착해 마지않았던 플랑 세캉스(시퀀스 숏)는 이충현 감독의 시작이었다. 데뷔작 단편 <몸 값>을 향한 찬사와 환호는 14분 분량의 러닝타임이 전부 플랑 세캉스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원조 교제 현장이 실은 장기 매매 장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가 주는 마법은 리얼리즘에 있다. 하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실시간의 리얼리즘, 다른 하나는 소품이나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현장감의 리얼리즘, 또 관객이 범죄 서사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수용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몸 값>은 하나의 숏-시퀀스가 전체 작품 속 복수의 시퀀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독립한 ‘몽타주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물론 ‘몽타주 없는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시퀀스 숏의 장면이라도 그 안에서 여러 번 시점과 배경, 앵글이 바뀐다면 의미 면에서 잘게 숏으로 나뉘고 이로 인해 몽타주가 발현하므로 쉽게 거부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작품을 두고 몽타주 없음을 언급하는 건 숏이자 시퀀스이자 하나의 작품인 <몸 값>의 자기 충족적인 완결성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리얼리즘에 더해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이 완결성은 카메라의 기교와 배우의 움직임, 그리고 범죄 서사가 짧은 시간 안에 응축하면서 이뤄진다.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 충족적이어서 완전무결한 시퀀스는 더 큰 범위에서 훌륭한 몽타주의 제재가 될 수 있을까. <몸 값> 이후 감독이 내놓은 작품은 이 물음의 답변처럼 보인다.
자기 충족적 완결성의 시퀀스
리메이크작 <콜>은 뒤에서 말하기로 하고 먼저 <발레리나>를 얘기해보자. 플랑 세캉스를 재사용하지 않아도 작품에는 전체의 부분으로서 인상적이고 준수한 시퀀스들을 지닌다. 영화는 경호원 출신 옥주(전종서)가 마트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는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후에 옥주와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발레리나 민희(박유림)의 아슬아슬한 발레 공연 장면이 이어진다. 또 바로 옥주가 팬케이크에 시럽을 뿌려 식사를 하거나 대만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집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이국적인 요소를 내비친다. 이외에 옥주가 복수하러 찾아가 변태 마약 밀매업자 최 프로(김지훈)와 맞붙는 액션 장면, 최 프로가 람보르기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광경, 총포사 노년 커플(김영옥, 주현)의 등장, 마지막 심해 속 발레리나의 몸짓까지 작품을 구성하는 시퀀스들은 감독이 애호하는 소재인 범죄 액션의 스펙터클한 에너지로 충만하거나 탐미적 시선과 감성으로 가득하다.
중요한 건 이러한 시퀀스들이 예술적 가치는 차치하고 시퀀스 하나로서 <몸 값>의 시퀀스 숏에 버금가는 자기 충족적 완결성을 띤다는 점이다. 이 시퀀스들은 나름의 독립적 면모를 바탕으로 개별 제목을 붙여도 될 법하다. 영화 첫 장면이라면 옥주의 강인함을 설득하는 <옥주>, 민희의 발레 공연 장면들은 퍼포먼스의 미감을 뽐내는 <발레리나Ⅰ, Ⅱ>, 다른 장면들은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부각하는 <최프로>, <총포사> 등의 제목을 지닌 고유의 클립이라 해도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물론 <발레리나>는 <테이큰>으로 대표되는, 특출한 기량을 지닌 인물의 복수극이라는 보편적 서사 위에 있다. 몽타주를 숏이 아니라 시퀀스 단위로 가늠해본다면 <발레리나>의 시퀀스들은 이 보편적 서사를 완성하는 이른바 ‘투명한’ 몽타주 자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각각의 시퀀스들이 지닌 자기 충족적 완결성은 고전적 서사 토대 위에서 이음매를 굳이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옥주가 마트에서 맞닥뜨린 강도들을 굳이 그토록 험하게 처단하는 영화 첫 장면의 함의가 다른 시퀀스들과 개연성 있게 결속하지 않는 게 대표 사례다), 명백하게 ‘투명한’ 몽타주라고 판단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해당 시퀀스들이 서로 경합하거나 침투해 유의미한 감각적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하면, 그러니까 ‘생산적’ 몽타주를 달성하는가 하면 시퀀스들이 보편적 서사를 느슨하게라도 이어주느라 제 역량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해 섣부르게 그렇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요컨대 이충현의 작품 세계에서 자기 충족적 완결성을 띤 시퀀스들은 진부해서 힘을 잃은 낡은 이미지가 아니라 되레 관객의 반응을 즉각 유도하는 시각적으로 강력한 이미지이고, 다른 시퀀스와 만나 변하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현재를 사는 이미지다. 따라서 이같은 시퀀스들이 몽타주의 재료로서 기능할 때 결국 빈약한 몽타주로 귀결되고 마는 건 아닐까 되묻게 된다.
한편 영화 <콜>과 감독의 두 작품, <몸 값> <발레리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감독의 선택이었다지만 아무래도 기존 작품을 리메이크했기 때문은 아닌지 짐작해본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관계한다는 타임워프 장르의 정통 서사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러니 자기 충족적으로 완결성 있는 시퀀스보다는 규범화한 서사가 전면에서 두드러지는 건 자연스럽다. 물론 과거 인물의 행위로 현재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예를 들어 존재가 사라지는 모습을 시각화한 장면과 같이 나름 봉합된 시퀀스들은 존재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하다. 이에 비해 전적으로 감독의 창작 의지에 귀속된 <몸 값>과 <발레리나>에서 드러나는 몽타주 형식의 특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확하다. 이 몽타주 형식을 ‘투명한’, ‘생산적’ 등 고전 몽타주 용어의 관점으로 완벽히 포섭하기는 어려워 빈약한 몽타주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이건 평가절하의 의미가 아니라 명명에 가깝다.
빈약한 몽타주
어떤 면에서 <발레리나> 속 몽타주는 징후가 아니라 현상이다.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길지 않은 길이로 인물의 움직임이든 서사든 촬영 기교든 일말의 자기 충족적 완결성을 갖추도록 편집돼 퍼진 영상들을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또 콘텐츠 하나의 분량은 짧을지 몰라도 해당 콘텐츠를 담은 플랫폼을 우리는 장시간 손에 쥐고 있다. 이때 플랫폼 안에서 영상들의 배치는 어떠한 몽타주 효과를 발휘하는가. 연결은 돼 있지만 각기 또렷한 이미지들의 배열은 몽타주가 아니라 정보의 나열에 가까운데, 이러한 정보값의 방정식도 몽타주라 한다면 그 형태는 무척 단순하다고 할 만하다. 이런 맥락에 대입하면 <발레리나>의 시퀀스들을 마주한다는 건 플랫폼에서 특정 계정이나 채널이 등록한 유사 주제의 영상들을 한정된 시간에 구속한 채 연속 재생해 관람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알고리즘에 근거한 디지털 형태의 몽타주 기법은 현실을 단순한 형태로 재단하는 동시에, 관객은 손가락 움직임과 재핑을 이용해 콘텐츠, 영상, 작품 등으로 불리는 텍스트 바깥에서 복잡하지 않은 방식으로 직접 몽타주에 가담한다. 어쩌면 이건 모순된 표현으로 몽타주 없는 몽타주, 경계 없는 몽타주, 또는 빈약한 몽타주일 것이다. 이제 우린 이런 몽타주를 반영한 영화를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