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과 세미의 감정선을 진지하게 설명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장난 같은 농담을 건네며 <너와 나>의 현장을 회상한다.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던 하은과 세미의 모습이 여지없이 오버랩되는 인터뷰였다. 배우 박혜수가 세미 역으로 <너와 나>에 먼저 합류한 뒤, 김시은은 네번의 오디션 끝에 하은 역을 손에 쥐었다. 극 중 내내 함께하던 세미와 하은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기점으로 상반된 운명을 마주한다. “이 영화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세미와 하은의 사랑”(박혜수)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두 배우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작품에 녹아들었다.
- <너와 나>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나.
김시은 조현철 감독님을 선배 배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연출도 하시는구나 싶어 놀랐다. 시나리오에 쓰인 시적인 표현들도 인상적이었다. 하은이가 세미를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동물, 동물이 아닌 것들까지 애정하는 마음이 글에 가득해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뭘까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이 결국 내가 사랑에 대한 감독님의 메시지를 좋아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 싶었다.
박혜수 상징이 워낙 많아서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엔 시나리오의 내용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랑과 삶, 죽음, 상실 그 모든 게 담겨 있는데 이걸 내가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그래도 세미와 하은이의 사랑이 너무 아름다워서 꼭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두 배우 다 시나리오를 읽은 뒤 여러 질문이 생긴 것 같은데, 그에 관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게 있다면.
박혜수 “감독님 이건 뭐예요? 이건 무슨 뜻이에요?” 하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여쭤봤다. 세미가 워낙 짜증이 많아서 이러면 관객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 상의를 통해 대사의 어미까지 세세히 다듬었다. 그래서 어쩔 때는 조금 웃기도 하고, 어쩔 때는 더 강도 높게 화를 내는 식으로 세미의 짜증에 디테일을 더했다.
김시은 나는 감독님에게 질문을 많이 하진 않았다. 첫 장편영화라 현장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탓도 있다. 대신 혜수 언니와 사전에 합을 많이 맞췄다. 일주일에 두번씩 만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 대본을 읽었다. 그렇게 하은이가 어떤 인물인지 깨달아갔다.
- 하은과 세미를 각각 어떤 인물이라고 분석했나.
김시은 하은이는 겉으로는 밝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내지만 말 못할 힘듦과 외로움을 지녔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 영화를 보면서도 궁금했다. 하은이는 왜 그토록 속내를 숨기는 걸까. 특히 세미에겐 더욱 그렇지 않나.
김시은 세미를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을 굳이 세미에게까지 말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도 있으니까. 다애한테 이야기하면 되지. (웃음)
박혜수 뭐라고요? 지금 제 앞에서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저 아직 과몰입한 상황이거든요! (웃음)
- 반면 세미는 좋아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박혜수 그렇다. 일단 하은이를 너무 좋아하고 그 마음을 도저히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화를 내고 질투도 하고 짜증도 많이 낸다. 그런 세미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인간적인 사랑을 하는 소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미워 보이지 않게끔 세미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두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세미는 하은이가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바라는데 하은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눠준다. 그런 상대 캐릭터의 태도가 잘 받아들여지던가.
김시은 의견 차이로 세미와 다투는 신을 찍다 진짜로 화를 낸 적이 있다. (웃음)
박혜수 같은 신을 여러 번 촬영하다보니 시은이가 감정이 쌓였는지 원래 준비한 것의 1.5배로 짜증을 냈다. 스탭들까지 다 당황해서 컷을 한 뒤 한참을 웃었다. 그만큼 세미의 사랑이 하은이를 힘들게 한다는 방증이다. 하은이의 배려를 모르고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줘!’ 하는 거니까.
김시은 가끔 화는 나도, 하은이는 세미의 그런 점까지 받아들였을 거다.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니까. 하은이는 상대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사람 같다.
박혜수 그렇게 보면 세미도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재지 않고 진심을 표현한다는 게 정말 용감한 행동 아닌가.
- 수많은 리허설과 연습을 바탕으로 대본이 많이 바뀌었다고.
박혜수 감독님이 신마다 두 가지 정도의 요소만 살리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연습 과정에서 우리가 하는 대사를 다 녹음하고 메모한 뒤 그걸 바탕으로 대본을 재구성하셨다. 그러다보니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배우를 무척 배려해주는 작업 방식이라 신선하고 재밌었다.
김시은 감독님이 “힘 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요”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그 뒤로는 정말 모든 게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간이 쌓이다보니 내가 세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더라. 감독님이 이런 부분까지 예상하고 꿰뚫어보셨구나 싶어 신기했다.
박혜수 확실히 자유도가 높은 현장이었고 감독님이 배우들의 사기도 잘 북돋워주셨다. 감독님의 3대 오케이가 있다. ‘뷰티풀! 원더풀! 미라클!’ 좋으면 뷰티플, 더 좋으면 원더플, 정말 더할 나위 없다 싶으면 미라클! 이렇게 단계가 올라간다. 감독님이 무전기로 셋 중 하나를 외치실 때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 김시은 배우가 오디션을 볼 때부터 박혜수 배우가 대사를 맞춰줬다고 들었다. 이후로 계속 합을 맞추며 서로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있다면.
박혜수 우리 둘이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현장에서의 순발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부족한 편이라 그런 스타일로 연기하는 배우를 부러워하는데, 시은이가 딱 그런 타입이었다. 하은이가 할 법한 통통 튀는 포인트들을 잘 살려줬다.
김시은 서로 장점이 달라서 시너지가 좋았다. 언니는 정말 꼼꼼하고 섬세하게 연기한다. 내가 자유롭게 표현해도 언니가 잘 받아주니까 더 신나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 두 인물의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서 극 중 나란히 앉아 있을 때마다 눈길이 갔다. 그 밖에 교복, 인형과 같은 소품까지 세심하게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박혜수 개인적으로는 교복 핏에 신경을 썼다. 치마는 이 정도 길이일 것이며 살짝 여유 있는 핏 덕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세미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 촬영 전에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는데 세미는 볼살이 통통한 게 어울릴 것 같았고, 마지막 10대 연기일 거란 생각에 살도 좀 찌웠다.
김시은 둘 다 학생 역할이라 화장도 하지 않았고 입술에도 바셀린 정도만 발랐다. 그래서 하은이나 세미가 화낼 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게 스크린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게 그렇게 좋더라. (웃음)
- 친구들과 간 노래방에서 세미는 하은이를 떠올리며 빅마마의 <체념>을 부른다. 원테이크 촬영에 울면서 노래까지 불러야 해서 배우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법한 신이다.
박혜수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 가사를 곱씹으며 부르는데, 어쩜 그렇게 슬프던지. (웃음) 준비할 땐 일단 너무 잘 부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원래 노래할 때의 습관을 많이 버렸고 머릿속이 하은이로 가득 찬 세은이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불렀다.
- 하은이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다보니 감정을 분출하는 신이 기억에 남았다. 먼저 떠난 강아지 제리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릴 때나 세미와 함께 탔던 버스에 혼자 앉아 우는 신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김시은 세미랑 버스에서 장난치는 신과 똑같은 버스에 올라 혼자 오열하는 신을 같은 날 찍었다. 세미가 “멋쟁이 토마토~”를 부르며 웃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사소한 일도 큰 행복이 될 수 있구나, 그걸 일찍 깨닫고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중요한 순간을 너무 놓치며 지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세미가 없는데 있는 것 같고 온기가 있는 듯한데 없는 그 시간이 정말 힘들었다.
박혜수 그 장면은 볼 때마다 나도 힘들다. 결국 하은이가 혼자 남겨지는 거니까. 그래서 가능한 한 세미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처럼 느껴지게끔 연기하려고 했다.
- 영화를 찍은 뒤 박혜수 배우가 <너와 나>를 작곡했고, 둘이 함께 부른 영상이 김시은 배우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다. 이 곡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말해준다면.
박혜수 세미와 하은이가 주고받은 말을 가사로 써보고 싶어 곡을 짓게 됐다. 감독님께 들려드렸더니 “이걸로 재밌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공연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고, 마침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앞뒀을 때라 시은이와 같이 연습해 노래했다.
김시은 언니가 작곡가로 데뷔하는 순간이자 내가 꿈꿔온 가수로서의 데뷔 순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했다. 가사도 <너와 나>를 본 분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 곡의 어떤 파트를 가장 좋아하나.
김시은 ‘나는 네가 되기도 해’가 떠오른다.
박혜수 나도 그 부분이 제일 좋다.
- <너와 나>는 시간순으로 흘러가지 않고 어떤 부분이 꿈이고 현실인지, 꿈이라면 세미의 꿈인지 하은의 꿈인지 모호하게 연출됐다. 이에 관해 각자 정리해본 부분이 있나.
김시은 개인적으로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서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결핍됐으면서도 충만한, 사랑으로 인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박혜수 관객이 세미와 하은이 중 누구에게 이입해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모든 해석이 결국 사랑으로 귀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제에서 GV를 할 때 관객들이 종종 ‘영화 잘 봤다’가 아니라 ‘저는 이 영화를 사랑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닿았구나 싶어 행복했다. 사실 사랑은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는 걸 더 많은 분들이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