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시장에 성수기란 여전히 유효한가. 텐트폴 영화 네편의 뜨거운 접전을 예견했던 여름 시장과 긴 연휴를 겨냥한 추석 시장의 삼파전은 예상과 달리 조용히 흘러갔다. 먼저 주요 배급사들의 전통적이고 암묵적인 성수기 배급 공식을 살펴보자. 제작 규모, 배우 패키지, 유명 감독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배급사는 한해의 가장 큰 작품을 영화시장의 대목인 여름 시즌에 내놓는다. 일명 7말8초. 7월 마지막 주부터 8월 첫째 주에 개봉하여 관객들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 오랜 배급 공식은 최근 관객 성향과 각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황재현 CJ CGV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근 2~3년간 관객들은 영화가 언제 나오는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나왔는지 여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추석 연휴가 아무리 길어도 보고 싶은 게 없으면 찾지 않고, 비수기여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게 나오면 꼭 찾아 나서는” 주도적인 관객 반응이 두드러진 것이다. 이영주 CJ ENM 배급팀장은 “<더 문>의 저조한 흥행 성적을 보고 리서치팀의 고객 분석을 강화했다. 추석이라는 시기만을 고려하기보다 추석에 누가 주요 관객이 되는지 직접적인 요소를 분석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길어진 연휴를 활용한 3040세대의 여행 의향을 파악하고, 기말고사를 앞둔 1020세대의 잔류를 보며 젊은 관객의 이목을 끌 만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로 배급을 재편했다.
성수기에 과감히 신작 배급을 하지 않은 곳도 있다. 여름 시장에서 누적관객수 514만명을 기록한 <밀수>를 선보인 배급사 NEW는 추석 시장에 참전하지 않았다. “관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개봉 시기뿐만 아니라 영화 외에 다른 볼거리와 놀거리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 소비층이 선호하는 축제, 국제 스포츠 행사, 가심비 기준 등 다양한 변수를 점검해야 한다. 올 추석의 경우 개봉을 확정한 작품이 많기도 했고, 다양한 행사가 겹치면서 경쟁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만 주요 타깃 시장이 명확하고 기획이 날렵한 영화라면 비수기 시장에서도 흥행의 기회는 있다고 생각한다.”(류상헌 NEW 배급팀장)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또한 여름·추석 시장 모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배급 관계자는 “예년 상황을 보고 날씨 예보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1인1색을 넘어 1인100색으로 취향이 초세분화되고 있는 지금, 어떤 영화가 언제 선택받을지 알 수 없다”며 과거의 기준이 절댓값이 되지 못하는 변화를 짚었다. 또한 “당장은 아니지만 기존 배급사가 따라온 성수기 공식과 다른 방향으로 더 나아갈 것”이라며 “대목보다 콘텐츠 특성에 적합한 시기를 찾는 게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국내 배급사 모두 한국영화 시장 내 성수기 무용론에 적극 동의하진 않았다. “관객의 소비 패턴 변화에 성수기의 의미가 표면적으로 흐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관점에서 마케팅 전략이나 콘텐츠 전략, 배급 전략에 있어 비수기, 성수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성수기 무용론을 수용하려면 올겨울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김세형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텐츠전략 팀장)
그렇다면 올해 남은 마지막 성수기, 연말은 모두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롯데엔터테인먼트는 김한민 감독의 <노량: 죽음의 바다>로 이순신 3부작과 올해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영화 속 눈발이 휘날리는 계절감은 물론, 실제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맞이한 날짜에 맞춰 개봉일을 잡았다. 해당 작품의 개성과 특장점을 먼저 고려해 배급을 결정했다. NEW 또한 정확한 관객 타깃을 공략하기 위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차기작 <괴물>과 애니메이션 <도티와 영원의 탑>을 개봉할 예정이다. CJ ENM은 연말 성수기 시장에 대해 “앞으로는 다른 작품과 출혈 경쟁을 감내하며 일정을 잡지 않으려 한다. 숨 고르기를 하며 우리 작품에 적합한 시기를 고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