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B와 우연히 일년 전 사진을 발견했다. 일년 전이라 하면 나나 B나 인생 최대 나락의 시기여서 거울을 보며 또 서로를 보며 우리는 모든 것이 소진되었고 한 시기가 훌쩍 지났구나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다시 꺼내본 사진 속 우리는 너무 앳되었고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은은한 광기와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거울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청춘의 심령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카메라를 통해 그 낯선 얼굴을 제대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청춘은 나에게 도깨비, 유령처럼 소문만 무성한 것이었다. 나는 줄곧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모든 것이 다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충분히 청춘이었던 적이, 제대로 청춘이었던 적이, 그저 청춘이었던 적이 이번 생엔 없는 거구나 싶어 섭섭했다. 창문 밖의 새순을 보며 수영복을 한참 골랐는데 현관문을 여니 이미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만 그런가? 요즘 만나는 사람들한테 자주 물어보곤 했다. 내가 지금 완전히 청춘이구나 느낀 적 있어?
몇몇 친구는 살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청춘이라는 감각은 없었다고, 어느새 이미 이렇게 되어버려서(?) 젊은이들의 거리를 걷다 보면 괜히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 SNS에서 보이는 청춘은 자신과 너무 다른 것만 같아 괜히 그 주변만 어슬렁거렸다고. 몇몇 친구는 현재의 감각으로 청춘을 느꼈던 적은 없지만 회고의 감각으로 청춘이었다고 뒤늦게 인식된 순간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은 청춘이라고 했다. 그 답변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나는 이렇게 호기롭게 청춘을 뽐내는 친구 곁에서 그리고 생의 유일무이한 시기를 지나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너 청춘이네? 그럼 나도 청춘이겠지? 가늠해본다. 친구에 비춰 내 청춘을 짐작해보지만 실제 나의 상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는 도무지 청춘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러 고민과 상황들에 점철된 거울의 표면을 아무리 닦아도 더 뿌옇게 흐릿해지기만 할 뿐 본연의 청년의 얼굴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청춘은 나에게 멀게만 느껴지는데 나는 지금 청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며칠 전 로케이션 헌팅을 나갔다.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4개 팀으로 이루어져 있어 많은 인원으로 인해 역삼동 사무실에서 로케이션 후보지로 버스를 대절해 이동했다. 로케이션 후보지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줄을 서서 이동했는데 클럽 앞거리를 걸으며 모두들 각자의 힘껏 반짝였던 한때에 대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그 모습이 소풍 가는 학생들 같아서 귀여워 보였다. 그 틈에서 나 또한 20대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20대 김세인의 시그니처 표정이라면 양쪽 눈썹은 살짝 올라가고 동공과 입이 똑같이 벌어진 얼굴이 아닐까. 놀라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닥쳐올 낯선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 1초에 열번쯤 흔들리는 눈동자로 ‘네?’를 반문하는…. 줄곧 그런 표정으로 20대를 지나왔다 생각하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꽤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그렇다) 내가 하는 행동이 불러올 결과도 모르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른 채, 내가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진심도 모르고,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스스로에게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20대 김세인의 의중을 헤아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청춘 드라마를 준비하며 청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을 때 뭐든 잘 모르겠고 낯설었다는 감각 이외엔 쉽사리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런데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라 뭐든 잘 모르겠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사는 것에 대해 정통하고 익숙한 상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잘 모르고 낯선 상태가 청춘의 고유함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청춘이 찬란하다는 것은 의심스럽고 그렇다고 암울하기만 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어쩌면 이 잘 모르겠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만이 맞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며 항상 스스로 먼저 선언했던 것 같다. 이건 슬픈 이야기야, 이건 화가 나는 이야기야, 이 인물은 굉장히 슬프고 화가 나 있어. 내가 쓰는 이야기와 인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내렸던 정의들이 영화 속 인물에게 큰 무게를 짊어지게 했다. 인물은 그것에 짓눌렸었다. 저번 편(<씨네21> 1426호, ‘너그럽게 열린 극장 문 앞에서’)에서 언급했던 고민의 해답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청춘 드라마야말로 카메라 뒤의 감독이 앞서 나가 인물을 이끄는 것이 아니고 인물이 충분히 그 순간을 경험하도록 의외성과 돌발성이 가능한 상태를 같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배우도 감독도 이 상황의 향방을 앞서 나가지 않도록 그저 지금의 얼굴을 제대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눈을 잘 닦아야겠다. 이 과정을 통해 카메라에 포착되는 청춘은 어떤 오묘한 빛일지, 어떤 청춘의 표정이 길어올려질지 기대된다. 꽤 엉뚱한 표정일 것 같기도.
영화를 준비하며 이성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려 하지만 극INFP인 나는 한편으로는 작품이 품고 있는 감정에 충분히 동화되려 하는 편이다. (MBTI는 별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특히 따릉이를 타면서 장면들을 자주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아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야’ 생각하며 바람결에 눈물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솔직히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거의 1년 가까이 이 청춘 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리며 따릉이를 탔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감상에 빠지면 안된다고. 담백하게 장면을 직시해야 한다고. 그럼 이제 따릉이 타면서 뭘 생각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