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너와 나’
2023-11-15
글 : 김철홍 (평론가)

<너와 나>를 처음 본 건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통해서였다. 때는 2022년 10월 초였고, 이번 극장 개봉을 맞이해 또 한번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람 시기를 밝히는 이유는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처음 영화를 보고 떠올린 사건과, 이번에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떠올린 사건이 달라졌다. 두 사건 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참사였으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사회의 제대로 된 위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두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너와 나>를 보며 이 영화가 소재로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10·29 이태원 참사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조심스레 해야만 하는 이 생각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떠올랐다. 죄책감을 가진 채 그 근거를 찾기 위해 황급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뾰족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영화 내내 화면 전체를 비추고 있던 뿌연 빛뿐이었다.

대신 기억나는 것은 이 영화의 감독 조현철이 한 시상식에서 배우로서 상을 받은 뒤 말한 수상 소감이었다. 그 자리에서 조현철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아버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자신이 믿고 있는 죽음에 관한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바로 죽음은 단순한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기에,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분명히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며 이 모든 것을 ‘믿는다’고 표현하며 소감을 마무리했다.

무수히 많은 거울로

<너와 나>는 말하자면 감독의 이와 같은 믿음을 전도하기 위한 영화다. 조현철은 영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특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을 겪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떠난 자들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려 한다. 여기서 <너와 나>가 봉착한 문제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명을 위해선 데이비드 라워리의 <고스트 스토리>의 예처럼 그냥 손쉽게 화면에 형상을 보여주면 그만이겠지만, 그들이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게 하기 위해선, 보다 창의적이고 복잡한 방법을 필요로 할 테다. 내가 믿음의 계기가 된 특정 장면을 잘 떠올리지 못했던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고백한다. 이제부터 <너와 나>가 어떤 방법을 통해 남겨진 존재를 믿게 한 것인지에 대해 적어볼 것이지만, 이 글엔 다른 영화들을 얘기할 때처럼 시각적으로 딱 떨어지는 명확한 단서는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감각하는 건 자신이 직접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주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너와 나>에 반복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 예컨대 유령 같은 존재가 암시되는 영화에서 거울이라는 소품은 사실 클리셰에 가깝다. 거울의 흔한 사용법은 어떤 존재가 거울에 비치느냐 비치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인지 유령인지를 구분하게 하는 것이다. 관련해서 현실의 존재와 거울에 비친 형상의 불일치를 통해 만들어내는 기괴한 이미지는 가장 예측 가능한 공포 유발 장치 중 하나다. <너와 나>에서 거울은 첫신에서부터 등장한다. 곧 세미(박혜수)로 밝혀지지만 영화가 막 시작해 아직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잠에서 깨서 창문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거울 속에 비친다. 이때 거울 밖 본체는 화면에 투숏으로 동시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본체와 거울의 형상이 불일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내 거울 속 이미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세미를 보여주며, 이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쉽게 확인시켜준다.

몇신 지나지 않아, 이내 다음 거울이 등장한다. 세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관리 사무소 외벽에 걸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거울이다. 하은(김시은)이 걱정돼 조퇴한 세미가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거울에 잡힌다. 이때 영화는 다시 첫 장면과 같은 ‘거울 페이크 트릭’을 선보인다. 세미의 본체보다 거울 속 이미지를 먼저 제시하며 짧은 불안감을 조성한 뒤, 곧바로 실제 세미의 모습을 거울 밖 화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공원의 한 정자에서 진행되는 신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울은, 이번에도 영화 속 존재를 모호하게 하는 애매한 트릭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세미가 심지어 (다른 영화에서 영화의 경계를 자주 허물곤 하는) 의미심장한 캠코더까지 든 채 거울의 안과 밖을 노골적으로 넘나들어도, 다른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명확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더욱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하은들에게

종합해서 보면 거울은 결국 맥거핀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모든 게 꿈 또는 환상인 듯 뽀얗게 처리된 화면이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비밀이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을 멈출 수 없게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거울이 끝끝내 아무런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대체 이 영화에 거울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현철 감독은 왜 남겨진 하은이 꾸고 있는 꿈속에 이렇게 많은 거울을 비치한 것일까.

그건 거울이 이곳에 빛이 있었음을 그 무엇보다 확실히 드러내는 물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물체에 세미가 반사한 빛이 닿았겠지만, 오직 거울만이 그 빛을 우리의 눈에 그대로 반사시켜 여기에 세미가 실재했다는 감각을 믿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은의 꿈에 거울이 그렇게 많이 등장한 건, 하은이 그 감각을 잊지 않았음 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너와 나>를 믿게 되는 건 이렇게 많은 수의 거울 때문이다.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분명 무언가 존재하고 있음을 결국 믿게 해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영화적’이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이런 상상까지 하게 된다.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영화를 감싼 눈부신 빛의 근원지가, 사실은 프레임 밖에서 영화를 향해 있는 무수히 많은 거울들이 반사를 통해 만들어낸 빛은 아닐까 하는 상상 말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어린 소녀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한 줄기 빛이 그 힌트였을지도 모른다.

그 뜨거운 마음 덕분에,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하은들이 여기에 세미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때, 둘은 비로소 온전한 ‘너와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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