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실패사를 지우는 이 자의 정체는, ‘더 킬러’
2023-11-15
글 : 유선아

킬러(마이클 패스벤더)는 타깃(엔드리 휼즈)이 맞은편 건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명상적 독백을 쏟아낸다. 그중에는 청부살인을 수행하는 킬러 자신의 작업 계율도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챕터를 지나 여섯 번째 챕터에 이르기까지 그가 벌이게 될 싸움에는 보수가 따르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더 킬러>는 타깃 사살 임무에서 실패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사살하는 킬러의 이동 경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끊임없이 되뇌는 계율은 진심이 아니거나, 언제든 위반할 수 있는 한낱 독백에 불과하다. 제거하라, 나의 실패를 알고 있는 자들을. 이것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킬러의 0순위 행동 강령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사를 하나둘 지워나간다. 그리고 최종 관문이자 실제로 보수를 지급하는 자인 클라이언트(알리스 하워드)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을 때 킬러는 클라이언트를 향해 겨눴던 총구를 내려버린다.기이한 양가성의 인물

짙게 드리운 히치콕의 그림자 아래에서 시작해 핀처 스타일로 현대화된 멜빌의 기호는 데이비드 핀처의 <더 킬러>에서 볼 수 있는 누아르 이미지의 정수다. 킬러는 공사 중인 텅 빈 공용 사무실(‘WeWork’)에 있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안가를 급습당한 이후 킬러가 미국 땅을 헤집고 다니며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에 몸을 구기고 앉아 쏟아지는 잠에 몸을 맡길 때 마침내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영락없는 노동자라는 것을. 그래서 킬러가 아무도 죽이지 않은 채로 클라이언트의 펜트하우스를 떠나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어쩌면 경쟁자와 중개자를 처치하고 최종 의뢰인과 직접 연결되려는 노동자의 인정 투쟁을 그린 우화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인다. 하지만 킬러가 클라이언트에게 총구를 겨누고 한밤중에 소음기를 장착한 총을 들고 찾아온 이유조차 짐작하지 못하냐며 물을 때 이미 킬러와 클라이언트의 지위는 전복되어 있다. 다섯 번째 챕터에서 전문가(틸다 스윈턴)가 들려준 사냥꾼-곰 농담은 이를 위해서였나 싶다. 숲에서 곰을 사냥하려던 사냥꾼은 곰을 죽이는 데 세번 실패한다. 매번 다른 무기를 들고 곰을 조준하여 쏘지만 곰은 어째선지 사냥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사냥꾼에게 말을 건다. 사냥이 세 번째 실패하자 곰은 사냥꾼에게 이전과는 다르게 이렇게 말한다. “너 사냥하려고 오는 거 아니지?” 분뉴욕에서 전문가가 이 농담을 들려줄 때 우리는 킬러가 사냥꾼의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시카고에 도착해 클라이언트와 마주한 킬러를 볼 때면 그는 사냥꾼이 아닌 전능한 곰이다.

킬러는 노동자이면서 초인인 두 얼굴을 지닌다. 이름 없는 내레이터(에드워드 노턴)가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으로 분열했던 <파이트 클럽>의 설정과는 반대다. 앞선 필모그래피에서 서사 전개의 복잡함과 인물의 (상대적) 명료함을 등가 교환한 것처럼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하는 킬러는 모순되는 가치와 계율을 동시에 내뱉은 기이한 양가성을 한몸에 욱여넣은 인물이다. 핀처는 현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편이라기보다 현대사회의 미국인과 그 징후를 진단하는 편에 늘, 조금 더 가까웠다. <세븐>에는 동기 없는 살인마의 편집증과 광증이, <파이트 클럽>에는 불면증과 정신분열이 있고, <더 게임>과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사회 특권층의 권태와 변태 성욕이 드러난다. <나를 찾아줘>는 뉴욕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자와 미주리 출신의 평범한 남자가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조차도 계급화하여 묘사한다. <소셜 네트워크>의 오프닝 대화 장면은 독일계인 에리카 올브라이트와 유대계인 마크 저커버그가 화제의 인물의 출신 성분과 교육 배경을 난도질한다.

핀처의 모든 영화가 계급론에 따라 현대 미국인의 정신 상태를 진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핀처는 이런 단서들을 유심히 살펴 서사를 축조하고 인물을 빚어내는 면모를 보여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 킬러>의 주요 인물에게 주어진 킬러, 타깃, 변호사(찰스 파넬), 짐승(살라 베이커), 전문가, 클라이언트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위계가 주어진 시장 구조를 환기한다. 킬러와 짐승은 수면 위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생태계 구성원이며, 변호사는 킬러와 짐승, 전문가를 클라이언트와 연결하는 중개인이다. 이 역할 분담은 결국 파워 게임으로 이어지는 서사의 초석을 쌓는다. 서사 면에서 <더 킬러>는 단순하다. 파리에서 임무에 실패한 후 벌어지는 모든 일은 킬러의 행적을 따라 현재를 쌓아올려 결말에 이른다. 따라서 핀처의 전작에서 보인 화려한 서사적 기교는 <더 킬러>에 없다. 대신, 킬러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자가 분열한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편집증에 사로잡힌 도망자, 오점을 지우려는 패자, 패자부활전의 승자는 모두 그를 부연설명한다.

새로운 현대인의 초상

에필로그에서 드넓은 저택 한쪽에 도착한 킬러에게서 노동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여기서 다시 킬러의 끈질긴 추격은 여자 친구를 해쳤다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그는 안가와 여자 친구가 입은 부수적 피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특권 계층이다. 킬러는 아무도 물은 적 없는 다수와 소수의 정의와 구분을 두번에 걸쳐 설파한다. “문명 이래로 항상 소수가 다수를 착취해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수가 아니라 그 소수가 되어라.” 핵심만 추리자면 여기에는 의미의 역설과 킬러가 보이는 태도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가 성실한 노역을 자처할 때 자연히 그는 다수이다. 여섯개의 창고에 빼곡히 들어차 있을 위장 신분증 때문에라도 그는 역시 ‘다수’이다. 전자의 다수일 때 그는 약자이지만 수많은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절대로 다치지 않을 다수일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킬러는 다시 다수와 소수를 정의하는데 여기에 청자인 우리를 슬쩍 끼워넣는다. “운명은 플라시보다. 유일한 인생길은 지나온 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소수에 속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처럼, (당신은) 다수에 속할지도 모른다.”

운명은 믿는 대로 될 거라는, 새롭게 분열한 자아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더니 자기 위계를 다수 속으로 집어넣는다. 실패의 과거사를 지워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어쩔 수 없이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를 앓고 있는 성실한 노동자, 보수와 성공 이외에는 관심 없는 자본주의의 숭배자였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호혜 협정을 맺는 데 성공한 그는 어딘가에 끼어 있는 특권 계층이다. 모두를 물리치고 비로소 안가에 들어섰을 때 킬러는 어둠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인파에 몸을 감추려는 듯이 자기는 다수에 속한다고 말한다. 특혜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 실언을 감추기라도 하듯 태평한 더 스미스의 노래가 중간부터 시작되며 황급히 킬러의 입을 막아선다. 번복하겠다. 핀처는 현대 미국인을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게 추정 진단을 제안했으되 확증은 늘 멀리했다. 그는 답을 요구하지 않지만 질문하게 한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비범하지 않다, 단지 다를 뿐. <더 킬러>는 새로운 징후를 상상한다. 킬러는 명명되지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이의 초상이다. 포식자도 희생양도 아닌, 혁명가도 파괴자도 아닌 새로운 인물은 이미 태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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