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연속. 1990년대 시네필을 말하자면 그들이 연속된 개체인가, 아니면 단절된 개체인가, 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선사시대 시네필(들)은 습관처럼 문화원 세대임을 내세운다. 자막도 없이 그 어려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소화했는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시대가 있었다, 고 전해진다. 1980년대가 되면, 문화원을 새롭게 출입하는 층의 성격이 바뀐다. 돈이 없는 데이트족 가운데 특이한 몇몇이 찾아가는 곳, 문화원은 그런 곳이 되었다. 1980년대에 시네필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극장부터 그랬다. 극장사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암울한 시기는 없다. 한국과 서구의 에로영화가 극장 간판을 온통 차지하던 시기,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은 간혹 걸리는 아카데미와 영화제의 수상작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국도극장에서 <욜>을, 명보극장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파리, 텍사스>를, 대한극장에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같은 영화를 거대한 스크린으로 본 기억 같은 게 당시 관객의 자랑일 것이다. 물론 눈 밝은 극소수가 찾아가는 곳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다수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건 그들만의 세상이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80년대에 생성된 몇몇 영화 집단과 대학교 내 영화 서클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나는 그 존재의 크기가 다소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가치는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학교와 영화의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경계에 선 장산곶매와 <파업전야>는 이례적인 경우였고, 그것조차 시네필보다는 사회운동의 한 영역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1980년대 시네필의 존재는 어떤 것이었나. 오히려 1990년대가 되면서 그들, 개별적인 시네필의 존재가 더 드러나게 된다.
시네마테크, 영화 잡지, 영화제
대학가에 상존했던 최루탄 가스의 냄새가 옅어진 1990년대, 청년들의 영혼을 낚아챈 새로운 존재 중 하나가 영화였다. 기존 극장의 스크린에서 <광란의 사랑>, <블루 벨벳>(벨벳 커튼이 걸린 서울극장과 <블루 벨벳>의 도입부는 환상의 조합이었다)을 보던 와중에, 종로에 생긴 두어 소극장, 그리고 혜화동에 자리를 튼 소극장에서 예술영화의 기치를 내세우며 그간 보지 못한 작가들의 영화를 걸기 시작하자 시네필의 불꽃이 폭발했다. 뒤늦게 <이레이저 헤드>가 스크린에 걸리는가 하면, 종로 소극장의 필름 클럽에선 레오스 카락스 같은 작가들을 놓고 토론했고(이건 전해 들은 이야기다, 나는 어디에 소속된 적이 없다), 신촌의 지하 소극장에 난데없이 안제이 바이다의 <아이 원트 유>가 상영되곤 했다. <아이 원트 유>를 나 혼자 보는 경험은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의 상영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진 아오야마 신지의 <쉐이디 글로브>가 서대문로터리의 극장 간판에 오를 때, 바로 뒤의 소극장에서는 <녹색광선>과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가 관객과 만났다. 그렇게 조용히 극장을 찾던 관객이 조그만 모임들을 형성했는데, 구심점은 PC통신이었다. 그중에는 하이텔의 ‘시네마천국’처럼 거대한 그룹이 운영되는가 하면, 10여명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소규모 모임도 있어서 저마다 색채를 뽐냈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 산재했던 영화 모임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거기에 모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는 가히 엄청났을 것이다.
이름을 내건 영화 집단이 영화의 창작으로 길을 낸 것과 달리, 소위 영화광들이 모인 집단의 성격은 대충 몇 가지로 분류된다. 제각기 영화를 보는 것이 기반이 되어, 영화를 본 뒤의 감상을 아마추어의 글솜씨로 쓰고 읽는 섹션이 중심을 이뤘고, 저녁 시간에 만나는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침 튀기며 영화를 이야기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그것도 모자라면 주말에 변두리 카페나 특정 장소를 임대해 밤새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통신의 특성상 온라인 게임의 형태로 영화의 지식을 다투는 특이한 분과가 있었는데, 영퀴방(영화퀴즈방)이라 불리는 곳이 대표적이다. 문제를 맞힌 사람이 다음 문제를 낼 권한을 이어받고, 대화방 내 사람들이 다음 문제를 서로 먼저 맞히려고 애쓰는 그런 형태였다. 지금 보면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대화방의 유명 고수– 예를 들면 듀나 같은 사람에게 이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문화와 더불어 비디오테이프는 마지막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영화를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열의는 저렴해진 대여료, 황학동 주변에 형성된 비디오테이프 판매점(셀스루는 아니고, 대여점이 문을 닫으면서 나온 테이프 등이 거래되었다)과 연결되면서 영화광이 밤새 영화를 보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집단 가운데 접근성이 높은 곳은 시네마테크였다. ‘문화학교 서울’이 이후 살아남았으나, 당시에는 대학 주변의 몇몇 유명한 시네마테크가 자웅을 겨루었다. 말이 시네마테크지 희귀한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볼 수 있는 장소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영화제나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젊은 시절 시네마테크의 운영진으로 활동했는데, 그들이 관람 전에 간략하게 영화를 소개한 뒤,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면 불편한 의자에 앉은 시네필이 작은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 영화의 화질이란 게 보기 괴로울 정도로 열악했다. 예를 들어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감독과 군집한 배우 지망생들이 등장하는 도입부의 경우, 사람을 분간하는 게 힘들어 자막으로 대충 내용을 짐작해야 했다. 그나마 색이라도 보이면 다행인 것이,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처럼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예도 있었다(소리를 제대로 듣기만 했어도 이 영화의 제목은 요나가 아닌 ‘조나’가 되었을 터다). 그래서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1990년대 이전에, 소위 시네필의 초기 멤버들이 쓴 글이나 서적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씨네21>에서 펴낸 <영화감독사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상기한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를 찾아보면 엉터리 소개에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옛 시네필은 태생적으로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서구인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티브이를 통해 고전영화와 함께 성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고, 동시대의 예술영화를 주변에서 본다는 것 또한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때가 1995년이다.
1995년 봄, 영화 잡지 <씨네21>과 <키노>가 나왔고, 가을엔 부산국제영화제가 거창하게 문을 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씨네21>을 읽거나 손에 든 사람이 눈에 쉽게 들어올 만큼 청년층을 중심으로 영화가 생활 속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씨네21>이 영화 문화의 일상화에 기여했다면, 시네필이란 단어가 심어진 것은 <키노>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결합으로 가능했지 싶다. 한국 시네필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던 동시대 영화 감상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빌려 드디어 해갈된 것과 더불어, <키노>는 그들의 존재에 자기 인식이 가능하게끔 도왔다. 기실 영화광이란 단어 대신 시네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도 이즈음부터다. 아울러, 세계의 예술영화 진영도 1970, 80년대의 작가들로부터 1990년대 작가로 탈바꿈하던 때라 부산국제영화제가 불러온 바람은 강력한 만큼 신선했다. 브루노 뒤몽의 <위마니테>의 도입부를 부산 국도극장의 거대한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며, 장선우의 <거짓말>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의 티켓을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옆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특히나 예술영화의 토양이 부실했던 부산 시내 극장의 화장실에서 관금붕과 부딪히는 사건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떠오르는 거장으로 소개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다 매번 잠을 잔 기억은 하도 많이 이야기돼 이젠 별 이야깃거리도 못 된다. 영화를 본 뒤 술자리나 숙소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문화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로 인해 정점에 올랐던 것으로 평가된다. 요즘 같은 해운대의 현대식 분위기와 달리, 남포동 구시가지의 정서와 영화 이야기와 사람들의 만남이 결합해 멋들어진 아우라를 형성한 시기였다.
세기말 시네필
그렇게 세기말이 다가오고 새로운 세기를 앞둘 즈음, 시네필의 풍경은 또 다른 혁명적인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것이 대체로 디지털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시 서구의 영화 잡지마다 디지털에 대한 예측으로 분주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세기의 전환과 함께 영화가 디지털로 제작됨에 따라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제작 편수가 이전과 비교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그즈음 한국영화는 긴 침묵에서 깨어나 새로운 르네상스의 단계에 진입했다. 자연스레 시네필은 영화라는 문화와 산업의 거대한 홍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여러 국제영화제가 생기면서 시네필이라면 연중 열리는 영화제 사이에서 순례지를 선택하는 즐거움을 누리느라 바빴다. 영화제가 외적으로 확장했다면, 이 시기의 시네마테크는 내적으로 변화의 깊이를 도모하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하는 구석방 문화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상영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공식적으로 상영권을 얻어 프로그램을 짜게 되었다. 그 중심에, 문화학교 서울을 전신으로 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스크린으로 옛 고전영화를 제대로 된 화면비율로 보는 역사는,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초기엔 상영비율을 잘 몰라 웃지 못할 해프닝– 존 포드의 <수색자>를 4:3 화면비율로 마스킹 없이 상영해, 촬영 조명이 텐트를 비추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도 있었다. 시네필 개인도 외부로부터 변화의 바람을 맞이했다. DVD와 블루레이라는 매체를 거치면서 영화 컬렉션의 품질이 급등한 단계를 지나 스트리밍과 디지털 파일의 생성으로 꿈의 개인 라이브러리라는 게 점차 가능해졌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어느덧 보지 못할 희귀 영화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감상의 부담이 역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 선택을 못하는 코미디. 개인 라이브러리와 함께 웹의 발달은 시네필을 집합적인 모임에서 다시 개인적인 존재로 몸을 틀게 했다.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상황은 이미 그 시기에 싹을 틔우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