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만분의 일초’, 기억을 부르는 풍경(風磬)과 손과 발의 풍경(風景)
2023-11-15
글 : 정재현

한적하고 으슥한 산속에 위치한 합숙소. 이곳은 세계 선수권 검도 대회에 나갈 5인의 국가대표 검도 선수를 선발하는 경연장이다. 이곳에선 훈련, 대련, 정신력을 종합 평가해 매주 최하위권 선수 5명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으로 국가대표 검도 선수를 선발한다. 모두가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산속으로 향하고 이 대열에 영화의 주인공 김재우(주종혁)도 합류한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재우가 넘어야 할 고비는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생애 처음 선발전에 포함된 재우는 “친분 있는 코치의 뒷배로 엔트리에 포함된 것 아니냐”는 동료 선수들의 시기와 의혹을 마주한다. 또한 “검도를 계속 할 것이냐”는 집안의 만류도 선발전 내내 맞닥뜨린다. 하지만 재우를 가장 괴롭고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는 선발전 내내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 황태수(문진승)다. 태수는 실력과 여유만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태수가 재우의 심기를 거스르는 까닭은 재우와 태수의 악연에 있다. 태수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재우의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 제공자다. 심지어 검도 사범인 재우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고 이후 종적을 감춘 채 가족 몰래 태수를 검도 선수로 육성했다. 과거의 상처는 끊임없이 되살아나 재우를 괴롭힌다. 재우는 호면 속에서 태수를 향한 증오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훈련에 매진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커져만 가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후보생들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만분의 일초>는 한국 스포츠영화에서 잘 다룬 적 없는 검도를 소재로 한다.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를 가득 채우는 요소는 검도가 지닌 몸의 언어다. 훈련을 준비하는 선수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대신 그가 호면을 착용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공들여 담으며 내면을 표현하고, 경기 자체의 스펙터클을 살리는 숏 대신 대련 시 선수가 겨눔세를 유지하기 위해 손과 발의 자세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클로즈업하며 명시한다. 그래서 손과 발은 <만분의 일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상대가 맹공을 엄습해올 때 일순간 미끄러지는 손과 일격을 가할 때 돌격하며 구르는 발은 별다른 스코어나 대사 없이도 기이한 긴장감을 부른다. 손과 발에 집중한 연출의 묘가 극대화된 장면은 재우와 태수의 스트레칭 신이다. 물러설 수 없는 서로의 마음을 파악한 두 캐릭터가 대련 후 등을 맞댄 채 서로를 둘러메는 스트레칭 장면은, 허공에 동동 뜬 발과 꺾인 허리만으로 본 적 없는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과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했다.

“남의 검도가 신경 쓰인다는 건 밖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거지. 황태수는 황태수, 김재우는 김재우. 너도 검도인이면 네 진짜 상대가 누군지 알잖아.”

서늘한 냉기로 가득한 영화에 훈풍이 부는 유일한 순간은 끊임없이 국가대표 선발전에 도전하는 최고참 선수 준희(장준휘)가 등장할 때다. 적시에 재우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네는 준희의 대사에는 검도 외의 영역에도 모두 적용 가능한 지혜가 묻어난다.

CHECK POINT

<밍크코트> 감독 신아가·이상철, 2011

재우는 주인공이고 그를 이끄는 감정의 동인도 명확하지만 어쩐지 쉽게 마음을 주거나 호감을 사긴 어려운 캐릭터다. 배우 황정민이 탁월하게 연기한 <밍크코트>의 현순도 마찬가지다. 현순은 그를 짓누루는 삶의 무게가 각박해 마음이 쓰이면서도 마냥 동정하자니 켕기는 구석이 많다. 재우와 현순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가 혈연 가족이라는 설정 또한 두 영화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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