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2023-11-17
글 : 이우빈
홍콩 근현대 시각 문화박물관 M+에서 열린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 콘퍼런스 지상중계
M+. 촬영 Kevin Mak. 사진제공 Herzog & de Meuron

11월2일부터 4일, 홍콩의 근현대 시각 문화박물관 M+에서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 콘퍼런스(The Origins of the South Korean Film Renaissance Conference)가 열렸다.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예술창의산업학과와 워싱턴대학교 아시아어문학과가 공동으로 주최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지원했으며, 주홍콩한국문화원이 협력했다. 이상준 링난대학교 교수와 김응산 워싱턴대학교 교수가 콘퍼런스의 공동 조직위원장으로 나섰다. 2003년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가 등장하고 국내 영화산업이 유례없이 부흥했던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풍경을 면밀히 분석하기 위해서 세계 각지의 학자와 비평가, 창작자가 모였다.공동 조직위원장 이상준 교수와 김응산 교수는 다음처럼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1980~90년대 한국 영화문화와 산업의 변화, 미디어 대기업의 등장, 시네마테크 운동,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 영화학교의 확산, 새로운 영화 저널리즘과 이론의 확대, 한국영화의 국제영화제 참가 등이 어떻게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본다.” 3일간의 콘퍼런스 일정에 참여한 <씨네21>이 현장 취재기를 전한다. 본 콘퍼런스에 협력했으며 한국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는 홍콩 M+의 실케 슈미클 샤넬 무빙 이미지 리드 큐레이터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콘퍼런스의 주제를 듣고 처음 든 느낌은 의문에 가까웠다. 당장 2023년의 한국영화계는 온갖 문제가 산적한 난리통이다. 그런데 지금 왜 20년 전의 호시절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콘퍼런스의 주제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아니라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이었다. 2003년뿐 아니라 그로부터 더 먼 과거의 맥락까지 포괄하겠다는 의미다. 3일간의 콘퍼런스 일정은 위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답의 단서는 콘퍼런스 공동 조직위원장인 이상준 링난대학교 교수와 김응산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말에서 먼저 찾을 수 있었다. “1990년대와 2천년대 초반을 관통하는 소위 르네상스기 이래, 할리우드가 전세계 영화 소비자의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한국영화는 비서구권 영화산업으로서 놀라울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그렇다면 대체 1990년대 초부터 2003년 사이에 한국영화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존재감이 미약한 비서구권 내셔널 시네마였던 한국영화는 어떻게 그리 빨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산업이 됐을까. 본 콘퍼런스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단서는 주최자의 행사 취지, 연사들의 공식 발표뿐 아니라 그들과의 사적인 대화에서도 얻을 수 있었다. 곧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대한 서적을 발간할 것이라 밝힌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현재의 다큐멘터리를 말하기 위해 과거의 것들을 더 깊게 파는 일은 불가피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 말하면 본 콘퍼런스의 의의가 된다. 2023년의 한국영화계를 직시하기 위해서 2003년의 한국영화계를 해제한다. 그때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혹은 그때엔 없었는데 지금은 있는 것을 비교하며 작금의 상을 그린다.

‘영화작가’의 한계

달시 파켓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

한달 전 <씨네21>은 올해의 여름, 추석 극장가를 결산하며 영화계 세대교체의 전말을 분석했다. 세대교체란 단어가 지닌 이전 세대와의 단절성을 지적했고, 본 현상을 세대교체란 단어 대신 신진감독들의 약진으로 갈무리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영화계의 세대교체는 다음과 같은 납작한 한마디로 축약되곤 한다. ‘포스트 봉준호, 박찬욱’이 어디 있는지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지금까지 한국영화계가 지겹도록 외쳐온 바다. 그렇다면 되돌아가서 묻는다. 포스트 봉박을 연신 호명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들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 범주이기에 우선 차치해야 할 것이다. 흥행으로 따지기도 어렵다. 그들보다 더 성공한 흥행 감독들은 많다. 그런데도 이 둘의 이름을 한국영화계의 객관적인 상징으로 쓰는 근거가 있을 테다. 이에 대해 칸영화제, 아카데미상을 언급하지 않기란 어렵다. 이른바 세계가 인정한 ‘영화작가’의 증거인 동시에 국위선양으로 말해지는 국제적 명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반엔 그 상패들이 없었다. 달시 파켓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가 지적한 대로 “실제 한국 영화감독들의 이름이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은 것은 2006~7년경”이었다. 2004년에 <올드보이>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긴 했으나 “당시 영화제 현장엔 한국영화의 폭력성과 장르성에 대한 반발”도 컸다. 또 “<살인의 추억>은 칸영화제에 입성하지 못했었고 <괴물>은 감독주간에 초청”됐었다. 즉 ‘세계적 한국 영화작가’의 본격적인 부상은 2003년 르네상스 시기 이후, 최소 2007년의 <밀양>에 다가가서야 찾아온 이야기였다. 봉준호, 박찬욱의 국제적 명성 이전에는 국내 관객을 설득하고 국내 영화산업을 일으켰던 내실이 먼저였다는 의미다. 돌아볼 때에야 선명해지는 과정이다.

이향진 릿쿄대학교 교수

영화작가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부작용도 언급됐다. 우선 이 단어가 가진 모호한 정의의 문제까지 여기서 언급하긴 어렵다. 대신, 속칭 ‘스타 감독’ 시스템이 불러온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글로벌 영화작가라는 독점적 목록 내의 영화감독은 다른 감독이 누리지 못하는 창작적 자유를 누린다. 이는 분명한 장점을 가지는 동시에 관객들의 시선을 좁힐 수 있고, 다른 영화감독들의 창작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라는 달시 파켓 교수의 말처럼 영화작가들의 이름으로 만든 일종의 정전은 불가피한 배타성을 띤다. 이향진 릿쿄대학교 교수도 세계적 영화작가의 실효가 2023년 한국영화계의 현황과 어떤 괴리감을 가지는지 비교했다. 단적으로, 2023년에 가장 흥행한 작품은 <범죄도시3>다. 작가주의에 기반한 세계적 평가와 실제 국내 산업에의 기여는 거의 다른 영역이란 설명이었다. 봉준호와 박찬욱의 이름이 ‘세계적 영화작가’를 대변하는 표상이었다면, 포스트 봉준호와 박찬욱의 등장이 한국영화계 제2의 르네상스를 부를 능사는 아닌 셈이다.지금의 한국영화계엔 포스트 <동갑내기 과외하기> <오! 브라더스> <첫사랑 사수궐기대회>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위 영화들은 2003년에 한국영화 흥행 순위 10위권 안에 든 작품들이다. 배경윤 조지아공과대학교 교수가 언급했듯이 2천년대 초중반의 한국영화계는 기이할 정도로 양면성을 지녔었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영화감독들의 고품질 영화와 함께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등의 단순한 조폭 코미디, 이것을 적절히 비튼 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km> 등 말 그대로 ‘다양’하며 재미있는 상업영화가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관객들은 <살인의 추억>뿐 아니라 이 영화들에까지 힘껏 호응했다. 소중형 상업영화의 충분한 가치와 흥행이 르네상스 시기의 튼튼한 허리였던 셈이다. 특히 이것은 올해 극장가에서 <달짝지근해: 7510>과 <30일>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며 여름, 추석 극장가 대작들을 제친 일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이 중요한 사실이다.

영화를 말하는 공간의 필요

최근 한국영화계의 위기는 극장가의 부진과 같은 뜻처럼 쓰이곤 한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이야기해볼 법하다. 르네상스 시기 극장가의 한국영화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던 것은 맞다. 그러나 이 호황의 기원을 찾았을 때 언급되는 곳은 극장이 아니라 ‘비디오테크’였다. 콘퍼런스 1일차의 두 번째 섹션인 ‘The Age of Cinephilia’에선 앤드루 데이비드 잭슨 모나시대학교 교수, 김지훈 교수,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등 적지 않은 연사들이 80~90년대에 융성했던 문화학교 서울 등의 비디오테크를 르네상스 시기 영화인들의 자양분으로 분석했다. <씨네21> 1352호 ‘21세기 한국의 시네필과 영화관의 (비)장소성’에서 이선주 부산대학교 교수가 설명했듯 “시네필 문화의 중요한 기반은 극장이 아닌 ‘비디오테크’ 상영 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OTT 산업으로 대표되는 영화산업계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영화매체의 소멸이라기보다 영화적 경험에 한한 다양성의 증진으로 볼 수 있다. 비디오로 영화를 본 이들이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듯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전부 해치진 않는다. 2023년의 영화계가 제기하는 ‘극장산업’의 위기란 한국영화의 위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다.

대신 90년대 비디오테크 문화, 2000년대 극장가 문화에 있었던 한 가지가 지금 부족하다. 영화를 ‘말하는’ 공간이다. 김지훈 교수의 말처럼 “90년대 비디오테크 문화는 사색적이고 비판적이며 분석적인 영상 관람을 촉진”했고 “문화, 취향으로서의 영화에 기여하며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등 차후 거장들의 감성과 태도”를 만들었다. 최근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보여줬듯 당대 비디오테크, 영화 동아리 등의 역할은 결국 사람이 모여 영화를 이야기하는 공간적 매개였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 매개의 수단이었고, 본질은 대화와 사색이었다. 제작과 배급 및 상영과 흥행의 난점도 크지만, 그 난점들을 이야기할 관객들의 시공간마저 부족한 셈이다. 지금의 한국영화계는 창작의 액션보다 관객의 리액션이 우선인 시기일 수도 있다.사람이 모여 영화를 보고 말하는 공론장이 반드시 물리적 공간일 필요는 없다. 과거의 PC 통신이 그랬듯 최근 출몰하는 몇개의 온라인 영화 커뮤니티들이 그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 <씨네21>과 같은 영화매체도 마찬가지다. <씨네21> <키노> 등의 영화매체는 본 콘퍼런스의 거의 모든 발표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일군 주연 중 하나로 언급됐다. 영화 주변의 모든 이들이 영화적 경험을 공유하고 말할 수 있었던 큰 축이었던 것이다. 즉 2003년을 회상하는 본 콘퍼런스의 목적은 이곳의 연사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과거의 영화인들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의 문제는 지금 영화를 보고, 말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문제였다. 왜 그때가 호시절이었는지, 그 호시절은 어떻게 성립되고 구성되었는지 살피는 시간이 이어졌다. 콘퍼런스의 주제를 듣고 처음에 생겨났던 의문이 점차 풀렸다.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의 키노트 연설

한명의 사람은 하나의 도서관이다. 한국영화사 아카이빙을 담당하고 있는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의 기억은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의 골자였다. 그가 처음 영화와 직면한 것은 당시 유일의 영화 이론서였던 김정옥 중앙대학교 교수의 <영화예술론>을 암암리에 구하여 읽던 1975년이었다. 이후 우연히 슈퍼 8mm 카메라를 구하게 되어 1979년에 박광수, 송능한 등 서울대학교 동문들과 ‘얄라셩’을 만든 때, 그리고 80년대 이후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시도했던 얄랴성의 중후기, 이후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으로서 <서편제> 등 국제영화계에 한국영화의 이름을 새기고 다녔던 시절까지의 장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우리 세대가 재능이 있었다기보다 그런 시대에 자리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이지만, 그가 한국영화계의 거인임을 부정하긴 힘들다. 연설을 마친 후 김홍준 원장이 공동 제작자로 참여한 KBS 다큐 인사이트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의 다큐멘터리영화 <한국영화의 화양연화>가 상영됐다. 더없이 좋았던 시절의 추억, 동시에 그 추억 이면에서 착취당했던 영화계 노동자들의 현실이 재생됐다. 어떤 황금시대에도 명암은 있다. 비록 2023년의 한국영화계가 암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그 이면의 명을 찾는 미덕 역시 필요하겠다.

<아메리칸 앨리> 특별상영과 비평 행사

<아메리칸 엘리>

콘퍼런스 2일차 밤엔 김동령 감독의 <아메리칸 앨리>가 M+ 시네마에서 상영됐다. 동두천 기지촌에서 성노동자로 생활하는 이주 여성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당일 콘퍼런스의 한 주제였던 ‘우먼스 시네마, 퀴어 시네마 앤드 인디펜던트 필름메이킹’(Women’s Cinema, Queer Cinema, and Independent Filmmaking)과 무척이나 밀접하게 닿은 영화였던 셈이다. 상영 후엔 김동령 감독이 참여하고 김응산 교수가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 자리가 마련됐다. 김동령 감독은 “여성단체에서 그들을 돕는 일과 그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찍는 일은 너무도 달랐다. 피해자로만 여겼던 그들을 복합적인 인물로 대하는 데 많은 고뇌가 따랐다”라며 당시의 촬영 경험을 홍콩 현지 관객과 나눴다. 콘퍼런스 3일차의 마지막 일정은 비평 행사 ‘루킹 백: 뉴 코리안 시네마 앤드 아시아, 어 크리틱스 세션’(Looking Back: New Korean Cinema and Asia, A Critics Session)이었다. 웨슬리 잭스 링난대학교 교수가 진행하고 매기 리, 로스 첸, 달시 파켓, 김네모 평론가가 참여했다. 각자가 경험한 한국영화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올드보이> <소년, 천국에 가다> 등을 언급했다. 위 부대행사들에는 콘퍼런스 참여자뿐 아니라 홍콩 현지의 영화팬, 주홍콩한국문화원 관계자 등이 다수 참여했다. 학술 행사의 범주를 넘어, 한국영화를 함께하는 축제의 현장이었다. 휘황한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집단 기억이 그들을 얼마나 가깝게 묶을 수 있는지 증명하는 자리였다.

사진제공 링난대학교 디지털예술창의산업학과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