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빈이 연기하는 <소년시대>의 지영은 부여의 흑거미, 즉 부여의 ‘블랙 위도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릿 조핸슨)처럼 강인한 신체와 격투 능력을 지녔지만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지영은 생각한)다. 어느 날 지영의 집 마당에 임시완의 얼굴을 한 병태가 들어온다. 부여 시내 뒷골목의 무정한 협객은 엉겁결에 동거하게 된 세상 물정 모르는 남자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근래 다양한 장르에서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 이선빈은 <소년시대>에서 그간의 호쾌한 매력을 근간에 둔 채 거칠고 험한 80년대의 막바지를 살아가는 여고생 지영을 생생히 그려낸다.
- <소년시대>의 대본을 읽고 어떤 점에 끌렸나.
= 평소 웹툰 보기를 즐긴다. 그중에서도 학원물을 특히 좋아하는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교복을 입고 고등학생을 연기할 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겠나. (웃음) 지영 캐릭터도 흥미로웠다. 흑거미라는 별명처럼 굉장한 카리스마를 지녔고, 드센 성격을 보이다가도 정의로운 면모를 비치는 반전 매력을 뽐낼 수 있다.
- 공교롭게도 이미 크랭크업한 차기작 <수능: 출제의 비밀>에선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연기했다. 한해에 교사와 학생을 모두 연기한 셈이다.
= <수능: 출제의 비밀> 촬영을 마치자마자 바로 <소년시대>의 지영이 됐다. 교사 역을 할 땐 교사가 돼본 적 없으니 학창 시절 보고 들은 간접경험에 기초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고등학생을 연기할 땐 이미 내 인생의 한 부분에 존재하는 시절을 꺼내면 되니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점도 분명히 있었다. 고등학생은 본인이 다 큰 줄 알지만 순간 툭하고 터져 나오는 어린 모습이 있지 않나. 그런 부분은 아무리 어른이 청소년인 척 연기를 한다 해도 잘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았다.
- 충남 천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천안시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천안 토박이로서 충청도 사투리 구사엔 무리가 없었을 듯하다.
= 고향 말씨를 신나게 사용했다. 지금은 이 정도의 사투리를 사용하진 않지만 아버지 세대만 해도 이만큼 사투리를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투의 디테일을 위해 아빠의 말투를 레퍼런스 삼아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토박이가 듣기엔 미디어에 등장하는 사투리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그게 시청자들에겐 익숙한 사투리일 것이다. 그래서 통상의 충남 사투리보다 진한 뉘앙스로 연기하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충남 사투리에 관한 영상, 충남 사투리를 구사하는 유튜버들의 영상을 통해 내 안의 사투리를 활성화하기도 했다. 흔히 받는 오해를 깨자면 충남 사람들은 절대 말이 느리지 않다. 단순히 ‘-겨’, ‘-여’로 말을 종결하는 것으로만 요약할 수 없는 충청도 특유의 박자도 있다.
- 지영은 싸움 실력이 뛰어나다. 일찍이 <크리미널 마인드> <오케이 마담> <미션 파서블> 등에서도 액션 연기를 선보인 적 있지만 <소년시대>는 본격적인 액션 장르가 아니다 보니 몸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 같다.
= 이전까지의 액션은 장르 안에서 정교하고 멋있는 합을 통해 완성됐다. 지영이 보여주는 액션도 물론 멋있지만, 이번 액션은 진짜 막싸움처럼 보이는 생활 액션이다. 전작의 액션 연기를 묘사하는 문장엔 ‘날렵하다’와 같은 지문이 쓰였다. 반면 <소년시대>의 액션엔 ‘우악스럽다’와 같은 표현이 쓰일 것이다. 지영은 싸움을 잘하는 친구라기보다 힘과 싸움의 기술을 타고났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본능에 근거한 무조건 반사적인 액션을 한다. 손이 먼저 나가고, 갑자기 공격당해도 재빨리 일대일로 수비하는 지영의 액션에 주목하길 바란다.
- 80년대 스타일의 머리와 옷이 정말 잘 어울린다. 80년대 분위기를 체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 어릴 때부터 “네 얼굴엔 옛 느낌이 있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만약 가까운 과거를 다룬 시대극을 한다면 진짜 잘 어울릴 거라 막연히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소년시대>의 대본을 보는데, 내가 가진 진한 이목구비에 80년대 헤어스타일을 더한다면 정말 복고 그 자체일 것 같았다. 주근깨를 많이 찍고 안경도 알이 큰 것 위주로 찾아 다녔다. 최대한 촌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할수록 멋있는 캐릭터가 완성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 지난 몇년간 정말 많은 작품에 얼굴을 비쳤고, 각 작품의 장르 또한 모두 달랐다. 다양한 작품을 오가는 중에 유지하고자 하는 이선빈만의 본질이 있다면 무엇인가.
= 여러 작품에서 연기하는 일은 나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공부해가는 계기가 된다. 지금 나는 이선빈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 한가운데에 있다. 올해 배우로 데뷔한 지 9년이 됐다. 경력 10년차를 앞둔 지금,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이 많다. 내가 연기한 모든 작품에서 매번 칭찬을 듣진 못할 것이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혹평을 받을 수도, 예상치 못한 찬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여 지금은 당장의 피드백에 연연하기보다 선택한 길 위에서 끊임없이 내가 어떤 배우인지 알아가고 발견해가고 싶다. 훗날 다른 인터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꼭 지금 고민에 관한 해답을 발견했는지 물어봐달라!
- <소년시대>는 배우 이선빈에게 어떻게 기억되나.= 작품마다 내게 남기는 인상이 다르다. 이미 촬영을 마친 <수능: 출제의 비밀>은 내가 가장 많이 배운 작품이고, <숨비소리>는 내게 가장 새로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소년시대>는 자유 그 자체로 남은 작품이다. 내가 지영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지영을 빌려 인간 이선빈을 보여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단 하루도 불편한 마음으로 촬영장에 간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