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순간의 진실, ‘물비늘’ 김자영, 홍예서
2023-12-08
글 : 정재현
사진 : 오계옥

수정(설시연)의 죽음 이후 예분과 지윤은 상실의 강에서 공회전한다. 각자의 상처 속에서 투쟁하다 재회한 예분과 지윤은 아주 천천히 서로에게 곁을 내주며 수정을 추모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잔칫날> <빅슬립> 등 수많은 독립영화와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얼굴을 보여준 배우 김자영은 예분이 손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듯 촬영 내내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려 애썼다고 고백한다. 주목해야 할 신인배우인 홍예서는 지윤의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깊이 이입해 현장에서 수정만 생각하면 자동으로 눈물이 났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배우는 상실의 물결에 조금씩 발을 담가갔다.

- 예분과 지윤은 물에 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촬영하는 동안 물에 들어가는 과정은 익숙해지던가.

홍예서 수영도 계속 배웠고,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 큰 걱정은 없었다. 그보다는 체질상 추위를 못 견뎌서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몸이 떨리는 것을 통제하는 일이 어려웠다.

김자영 예분이 들어가는 강은 하반신이 잠길 정도의 깊이였다. 강바닥의 자갈이 미끄러워 흐르는 물속에서 중심을 잡고 연기하는 게 쉽진 않았다. 나를 보호하던 스탭이 물에 빠진 적도 있다. 거기에 물안경과 헤드셋도 쓰고, 금속 탐지기까지 들고 물속에서 연기하려니 힘이 들긴 했다.

- 일전에 김자영 배우는 <물비늘>의 시나리오를 ‘강하다’라고 요약한 바 있다.

김자영 염습을 전문으로 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매번 죽음을 목도해야 하지 않나. 죽음 자체가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예분이 이 직업을 택한 것이 생소해 감독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는데, 예분이 사별한 남편의 직업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전사를 들었다. 예분은 큰 의지 없이 염습을 업으로 삼은 것이다. 예분의 전사를 말해주는 플래시백 장면 없이 영화가 흘러가는지라 내 연기만으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우선 나 스스로 예분을 이해하고 연기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예분의 여러 사정을 염두에 둔 채 연기했다.

- 홍예서 배우는 오디션 전 <물비늘>의 시나리오를 ‘쪽대본’으로 받았다고.

홍예서 수정과 지윤, 예분과 지윤 그리고 옥임(정애화)과 지윤의 대사로 구성된 쪽대본을 받았다. 전체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캐릭터간 관계성을 설정해가야 했다.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천천히 분석해보니 관계의 아귀가 맞아들어갔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오디션 전 분석해온 캐릭터끼리의 관계를 먼저 답해달라고 하셨다. 운 좋게도 감독님이 출제한 시험문제를 전부 맞히며 작품에 합류할 수 있었다.

- 예분은 미디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할머니 캐릭터가 아니다. 늘 술에 빠져 알코올중독자로 살고, 손녀의 친구이자 친구의 손녀인 지윤에게도 살갑지 않고 정색한 모습을 보인다.

김자영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스테레오타입대로 특정 연령을 연기하길 선호하지 않는다. 아줌마스러운 것 혹은 아가씨스러운 것… 옳지 않다고 본다. 누구든 각자의 개성을 보유한 채 소녀에서 아줌마로,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변해가는 건데 그 과정에 정해진 틀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최대한 ‘나’로부터 모든 배역을 출발해가려 한다. 예분을 연기할 때도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정형화된 표정이나 말투를 구사하기보다 나로부터 출발해 가슴에 머금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할머니 같은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내가 느낀 진실한 감정, 그걸 포착해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 <물비늘>은 김자영 배우의 본격적인 액션영화다. 수중촬영이 늘 동반되고 마을 사람들과 육탄전도 잦다. 그리고 예분은 몰아치는 상실 앞에서 몸으로 버티고 사는 캐릭터다.

김자영 후반부 육탄전이 특히 고됐다. 누군가는 힘을 안 들이고도 액션 연기를 할 수 있다던데, 나는 안되더라. 온몸으로 연기하지 않으면 느낌이 안 살 것 같아 힘주어 연기했다. 시멘트 가루 포대를 푹푹 찢는 게 호흡기에 안 좋을 것 같다는 염려도 나중엔 무색해지더라. (웃음) 액션 배우들을 존경한다.

홍예서 그 장면이 원 테이크로 찍히지 않았나. 자영 선생님과 내가 그 장면을 18번 찍었다.

- 지윤은 갖은 고통에도 도대회 수영선수 선발전 엔트리에 뽑히려 안간힘을 쓴다. 지윤이 수영에 집착하는 이유가 영화엔 제시되지 않는데, 배우로서 이 공백을 어떻게 채워갔나.

홍예서 지윤이 수영을 하는 이유는 오직 수정 때문이다. 도대회 선발전은 수정이 준비했던 대회다. 수정이 이루지 못한 꿈을 어떻게든 이루어내고 싶은 지윤의 간절한 마음이라 생각했고, 감독님도 이 의견에 동의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수정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윤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려 했을 것이다.

- 김자영 배우는 지난해 정동진독립영화제 ‘5교시 영화수업’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위해 일상에서 많은 감정을 기억해둔다는 연기론을 밝혔다. 앞서 말한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는 과정과도 밀접한 기제로 느껴진다.

김자영 감독님들이 종종 “감정 잡아주세요”라고 요구하지 않나. 그런데 감정을 어떻게 잡지? 감정은 지나가는 거라 잡아두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에서 내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의 깊이와 세기를 기억해두려 노력한다. 물론 그 감정을 머금고 있어도 현장에서 여러 제반 사항이 받쳐주지 않으면 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린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다. 남들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까. 순간의 진실을 잡고 싶다. 그 순간의 진실을 잡지 못하면 감정적으로 무용해진다.

- 홍예서 배우에게는 <물비늘>이 첫 장편 주연작이다. 이번 영화를 찍으며 연기 노하우가 생기던가.

홍예서 지윤과 나는 닮은 점이 많은 캐릭터였다. 그래서 캐릭터에 쉽게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캐릭터가 나와 닮아 있을수록 ‘이런 감정이겠지’ 하고 넘겨짚지 않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채 캐릭터의 다면적인 구석을 살피는 습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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