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카메라,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 어떤 영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타계를 반년 앞둔 시점에 피아노 앞에 앉은 거장은 직접 선곡, 편곡, 녹음과 연주 데이터의 기록 방법을 조율해 8일간 20곡을 연주한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 힘겨움과 희열, 때로는 숨 고르고 건반을 조율하는 순간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다. 올해 3월 우리 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을 돌아보며, 12월27일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돌비 애트모스로 개봉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소개한다.
미완의 악상보다는 온전한 코다(악곡의 종결부)를 남기려는 자의 결정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평소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이라 평했던 NHK 509 스튜디오 무대에서 며칠에 걸쳐 20곡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 것은. 혁신과 실험정신, 호기심과 비애를 평생 독특하게 결합한 예술가였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통해 피아노라는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의 마지막 정규 앨범인 《12》가 명상적 미니멀리즘의 아름다움과 심오함을 품었던 것처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객석이 텅 빈 공연 영화이자 전기적 서술이 없는 회고록으로서 오직 한 사람의 영혼을 비추는 데 충실한 영화다.
작별 혹은 축제의 의식
“한번 더 납득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2022년,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류이치 사카모토가 아들에게 남긴 전언은 이러했다. 2021년 직장암 진단을 받고 대규모 글로벌 투어는 물론 단독 공연조차 일절 중단했던 그가 병과 함께 70대를 맞이한 해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아우르는 20개의 곡을 선별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2022년 9월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NHK 509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강행했다. 하루에 3곡씩, 곡마다 2~3번의 테이크에 걸쳐 연주할 동안 촬영감독 빌 커스테인과 30여명의 스탭들, 3대의 4K 카메라 외에 그의 주의를 빼앗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브 공연이 불가한 신체적 조건이 이 초로의 거장으로 하여금 자신과 음악만 남겨질 수 있는 완벽한 진공 상태 속으로 걸어가도록 허락한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소수의 아이콘들이 그러하듯 음악사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 작곡가, 피아니스트,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영화음악 감독, 프로듀서, 배우, 열렬한 환경운동가이며, 클래식, 얼터너티브, 전자음악, 사운드트랙을 아우르는 장르적 실험 정신은 데뷔(1978년 《Thousand Knives》)부터 마지막 앨범(2021년 《12》)까지 꾸준히 율동했다. 오직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한대만을 위한 편곡이 돋보이는 이번 작품도 그의 방대했던 호기심, 혁신, 서정의 궤적을 고루 흡수했다. 우선 그의 영화 커리어를 꿰뚫는 선곡이 돋보인다. 음악감독 데뷔작인 <전장의 크리스마스>(감독 오시마 나기사, 1983)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마지막 황제>(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87)의 <The Last Emperor>, <마지막 사랑>(감독 베르나르도 베르 톨루치, 1990)의 <The Sheltering Sky>, <폭풍의 언덕>(감독 피터 코민스키, 1992)의 <The Wuthering Heights>, <토니 타키타니>(감독 이치카와 준, 2005)의 <Solitude>, <바벨>(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2007)의 <Bibo no Aozora>,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감독 미이케 다카시, 2011)의 <Small Happiness> 등이다. 그 밖에도 류이치 사카모토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테크노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음악부터, 2017년 발매된 《async》, 투병 생활 중에 일기처럼 써내려간 음악들에 날짜를 제목으로 붙인 마지막 앨범 《12》까지의 곡들을 폭넓게 아우른다. 엔딩곡은 1999년 앨범 《BTTB》의 <Opus>다.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예술적 생애를 응축하듯이, 103분간 이어지는 공연의 몽타주는 해가 저물고 다시 떠오르는 하루의 시간을 빛으로 구현해낸다. 무대 위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조명을 따라 카메라의 무빙도 드라마틱한 전환을 이어간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얼굴은 어둠에 잠긴 뒤 이내 빛으로 돌아온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촬영을 끝낸 후 발표한 공식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하루에 몇곡씩 집중해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공허함을 느꼈고 한달 정도 몸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만족할 만한 공연을 녹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육체의 시간
전설적인 음악가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의미심장하게 남기는 공연(혹은 작품)이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상을 떠나기 약 두달 전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교향곡 7번을 연주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2년의 공백을 깨고 타계 2년 전인 1986년에 미국 공연을 재개해 카네기홀에 섰다. 두 공연 모두 예술가의 말년에 새겨진 상징적 작별 인사로 꼽힌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던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 역시 생전 발매한 마지막 싱글 《LAZARUS》 뮤직비디오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서 <Bibo no Aozora>의 마지막 음을 누르는 손가락이 아직 건반에서 떨어지지 않은 순간에 류이치 사카모토는 나지막이 고백한다. “힘들어요. 몰아붙이느라 무리했어요.” 음악의 황홀함에 잠시 물러나 있던 병색을 자연스럽게 불러들인 그는 건반 튜닝을 마친 뒤 천천히 다음 음악으로 나아간다. 이어지는 곡은 젊은 날을 대변하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Tong Poo>로, 원곡보다 한껏 경쾌하고 화려한 톤으로 시작하더니 이내 선율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는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더이상 과거처럼 빠르고 힘 있게 연주할 수 없는 대신 자신의 현재를 기입한 테크닉과 아이디어에 의지해 새로운 표현에 다다른다. 요컨대 건반만 있다면, 피아니스트는 편곡과 연주로서 자신의 육체를 현존하게 할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공연이기에 앞서 마지막 ‘실험’이라면 말이다. 강건했던 예술가가 흔들림과 잦아듦으로 자신의 파장을 대체해서라도 끝까지 연주하려던 작품, 오퍼스는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그 현장에 잠입하게 된 관객은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서 넌지시 바라게 된다. 삶에 남겨진 거의 유일한 방법을 동원해 자기 존재를 기념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이것은 작별 인사라기보다 차라리 은밀한 축제의 의식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