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긴 항목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세대를 가르는 것이다. 아이폰 1세대(디지털 디바이스), 싸이월드 세대(SNS), 4세대 걸그룹 뉴진스(아이돌) 등등. 그중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대원미디어는 한국 관객으로부터 일명 ‘지브리 세대’를 이끌어냈다. 지브리 세대는 전 연령대의 생애 주기를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과 함께한 세대를 가리킨다. 다정한 <이웃집 토토로>와 함께 유년기를 보내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의 경쾌함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뒤, <마루 밑 아리에티> <코쿠리코 언덕에서> <추억의 마니> 등 잔잔한 감성 곡선과 함께 청년기를 보낸 세대. 대원미디어는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수입을 통해 공통된 문화적 교집합으로 쉽게 뭉치는 관객을 가로질러 하나의 세대를 형성했다. 애니메이션 작품이 곧 그 세대이자 시대를 상징하는 풍경 앞엔 늘 대원미디어가 자리하고 있다. 정동훈 대원미디어 대표와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 스튜디오 지브리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누적 관객수 200만명을 돌파했다. 전례 없는 극장 침체기에도 수입사로서 해당 작품이 관객에게 선택받을 수 있던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나.
= 올해 2월 직접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시사를 마쳤을 때, 대원미디어 직원 사이에서도 반응이 살짝 나뉘었다. 전쟁 관련 배경이나 물음표를 남기는 아리송한 장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큰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컸다. 이들은 아름다운 작화와 연출기법, 개성 있는 테마와 메시지까지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고유한 자산을 쌓아왔고, 관객들도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수입하기 위해 정동훈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전해들었다. 대표 자리에서 실무 과정을 직접 확인하고 싶을 만큼 작품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컸던 걸까.
= 내가 일본에서 직접 시사를 마친 직원 중 한명이었고, 작품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잘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하지만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던 건 나보다 현장에 앞선 영화사업팀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팀, 유관부서의 구성원 덕분이다. 다만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이 프레임에 갇히지 않도록 더 큰 그림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쉬운 과정은 아니다. 의지와 다른 난관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공하는 소스가 한정적이라 마케팅 자료로 클립을 만들거나 콘텐츠를 선보이기가 어려웠다.
- 방금 이야기한 어려움처럼, 스튜디오 지브리는 판권 활용에 상당히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스튜디오 지브리와 함께하면서 익힌 지브리 맞춤형 전략이나 대처가 따로 있나.
= 보통은 마케팅을 위한 자료를 수급해주는데 이번 작품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시장과 관객의 판단을 받고 싶어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삶을 관통하면서 자신이 주요하게 생각한 질문을 담은 작품이라 더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싶어 한 듯하다. 어떤 면에선 공감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다양한 해석이 중요한 작품인데, 마케팅적으로 관전 포인트를 짚어내는 순간 관객들은 하나의 코스로만 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스튜디오 지브리와의 소통 과정에서 큰 노하우는 따로 없다. 너무 상투적인 답일까. (웃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정책과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작품으로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지점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성장에 더 집중하는 면들을 대원미디어가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 일본 애니메이션을 발굴하고 수입할 때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기까지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에 트렌드나 관객의 관심사가 변할 수도 있는 데 이런 격차는 어떻게 좁히려 하나.
= 보편적인 프로세스를 보면 원작 만화가 먼저 나오고 애니메이션화 된 뒤에 극장판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원작 만화를 통해 원석을 먼저 찾아내는 경우가 있고, 또 대원미디어가 인연을 맺고 있는 관계자나 아티스트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대원미디어의 자산이기도 하다.
- 대원미디에서 진행한 <짱구는 못말려> 팝업 스토어는 연일 오픈 런을 갱신하며 흥행 사례를 기록했다. 만화 <짱구는 못말려>를 보고 자란 세대가 이제는 “풀매수!”를 외칠 만한 경제력을 지닌 주요 소비층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라이프타임 IP의 특징을 꼽아보자면.
=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건 보편성과 참신성이다. 애초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부족하면 초기 마켓 형성부터 어렵다. 또 유연성을 갖고 관객의 변화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은 필연적으로 동시대성과 당시의 트렌드, 현안 과제를 품고 만들어진다. 이 말은 어느 작품이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부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관객의 가치관, 일상적 기술 등을 작품 안에 부지런히 녹여내는 게 중요하다.
- 2023년에 대원미디어는 만화 <슬램덩크>,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원천 스토리의 힘을 관통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앞으로 어떤 시도와 계획을 준비하고 있나.
= 콘텐츠의 트랜스 미디어적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무직타이거는 웹툰화, 영상화 등으로 세계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고, <아머드 사우르스>는 미국 MGA사와 세계관을 좀더 직관적이고 흥미롭게 가다듬어 완구 시장을 겨냥하고자 한다. 또 판타지 소설 <묵향> 1부의 웹툰화를 비롯해 오리지널 IP를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확장해가고 싶다.
어린이들을 어른처럼 대하는 곳 -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으로
2001년 10월1일 개관한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기 하야오 감독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곳이다. 영혼이 편안해지는 곳. 흥미로운 것을 잔뜩 발견할 수 있는 곳. 명확하지만 일관된 철학이 담긴 곳. 미야자키 감독은 공간 설립 단계부터 스튜디오 지브리의 세계를 현실로 확장하기 위한 명확한 신념과 철학을 쥐고 있었다. 특히 여느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그러하듯, 바람과 햇빛이 자유롭게 흐르는 온화한 분위기의 공간을 자아내고자 했다. 그만의 운영 방침도 눈에 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을 찾는 어린이들을 어른처럼 대하라는 방침을 두었다. 어린이를 어엿한 1인 방문객으로 존중하고 공감을 경험하는 방식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방문객을 정해진 코스대로 통제하지 않는 것도 미술관 안에서만큼은 자기만의 자율적인 모험이 이뤄지도록 돕는다.
미타카 지브리 미술관에 도착하면 방문객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상당한 크기의 토토로다. 토토로가 비밀스럽게 가리키는 입구를 따라오면 지브리 캐릭터, 생기 넘치는 꽃과 식물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먼저 보인다. ‘영화가 탄생하는 곳’이라는 주제의 1층은 총 5개의 객실로 구성돼 있다.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은 작업실을 엿볼 수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한지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 전시이기도 하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원칙적으로 실내 전역이 촬영 금지다. 이 금기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운 공간이 바로 옥상정원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동상이 세워진 이곳은 미술관 방문을 사진·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은 이들이 붐비기 때문에 때에 따라 다소 긴 줄을 서야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단편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미술관 지하에 위치한 새턴극장은 약 80석 규모의 작은 극장으로 단편애니메이션을 상영한다. 2024년 1월에는 <애벌레 보로>가, 2월에는 <코로의 즐거운 나들이>가 상영될 예정이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일시 지정의 예약제로 진행되며, 매월 10일에 다음달 1개월분이 발매된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 티켓은 일시 지정 예약제,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ghibli-museum.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