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하는 단순함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머와 패러디를 더하는 것이 코미디의 사명이라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여기에 한때 금욕주의라고도 불렸던 일관된 미니멀리즘의 스타일을 더한 희귀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 관해 1차적으로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세트에 이르는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함이 삭막한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노출하면서 때로 비애감과 시적인 감흥까지 짙게 불러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니멀리즘은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극히 일부만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남는다.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르 아브르> <희망의 건너편>까지 감독의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이 절망 위의 희망을 꾸준히 노래해온 것에 비하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외려 건조한 영화일 수 있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당황시킬 법한 국내 제목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시사하듯 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멜로드라마적 낭만과 비애를 아낌없이 불러들이고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자주 수식하는 또다른 말은 데드팬 코미디다. 감정을 거세해 차갑게 식은 코미디를 구사하는 것치고 그의 영화는 인간적 온기로 가득하다. 어쨌든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경우 그 제작 자체만을 놓고 보아도 데드팬 코미디임에 틀림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1986년작 <천국의 그림자>, 1988년작 <아리엘>, 그리고 1989년작 <성냥공장 소녀>가 완성한 3부작의 ‘잃어버린’ 4편을, 그것도 은퇴 선언까지 번복해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놓은 것이다. 광산, 성냥공장, 쓰레기가 뒹구는 거리를 떠돌던 빈곤하고 내성적인 이들이 영혼의 연결고리를 찾아나섰던 앞선 작품에서, 카우리스마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생이 인간 됨의 조건 중 일부를 영속적으로 상실하는 과정임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면서도, 그에 굴복하지 않는 놀라운 유쾌함과 서정으로 주의를 환기하곤 했다. 여전히 1980년대라고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이나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되는 것으로 보아 근과거쯤으로 보이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시절도 비슷하다. 우리는 안사(알마 푀위스티)가 판매일이 지난 음식을 가져갔다가 해고당하고, 홀라파(유시 바타넨)가 안전 장비가 부실한 환경에서 부상을 입어도 보상받지 못하는 날들을 본다. 그것은 보드카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의 깊은 실의, 일련의 저임금 노동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40대 여성의 불운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표정, 때로 정지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카메라와 침묵을 유도하는 리듬감으로 인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얻는 부수적이지만 확실한 효과는 다음과 같다. 어딘가 아둔해 보이는 관료 스타일의 식료품점 주인과 북유럽 곰처럼 생긴 경비원이 뚱한 얼굴로 안사 앞에 서 있다. 안사가 그들 앞에서 치욕적으로 가방의 소지품을 게워내야 할 때, 옆에는 지금껏 함께 일해온 두명의 동료가 곁을 지키고 서 있다. 안사가 몰래 넣은 샌드위치가 발견되자 급기야 동료 한명이 자신 또한 가게의 물건을 챙겼음을 당당히 고백한다.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였대도 명백히 감동적인, 그러나 어딘가 교과서적으로 느껴지는 이 설정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는 경직된 얼굴의 능청스러운 대치, 어색한 대화의 공백, 희한한 위트로 점철된 말싸움으로 탈바꿈한다. 이내 기가 꺾인 관리자들을 버려두고 (비록 해고되었으나) 위풍당당한 중년의 여자들이 일터를 걸어나온다. 비극성은 그제야 각인된다. 간결함의 마술을 굳이 코미디의 효과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로베르 브레송의 엇나간 후예로 간주해볼 때,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비롯한 그의 영화의 동화적 면모는 일상의 인과를 초월해 본질로 다가가기 위함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오늘날에 홀라파가 안사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말 그대로 손에서 떨어트리는 바람에 잃어버리는 장면도 그 일환이다. 유사한 설정이 동시대의 영화 일반에서는 거의 유효하게 적용되기 힘들 것이란 합리적인 추측과 함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통용되는 초월적인 리얼리티는 동시대의 노동 환경과 디지털 중심주의에 대한 단순하고 힘 있는 묘파로 기능한다.
공간과 음악이 말하는 것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묵함을 닮은 영화지만 배경막에 존재하는 멜로디에까지 인색한 것은 아니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자주 그러했듯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공연 장면은 안사와 홀라파가 노래방에서 처음 눈을 마주치는 저녁처럼 만남의 가교가 되어주는 동시에 현실의 차가운 공기에 막간을 부여하는 일종의 영화적 콩트로서 자리 잡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거나 엇갈리는 시선들이 선율과 맞물려 욕망과 희망, 우울과 고독의 결정들을 흘리는 효과는 놀라우리만치 미묘하다. 이 가운데 손꼽게 사랑스러운 순간은 안사를 위해 금주를 결심한 홀라파 앞에 나타난 핀란드의 여성 2인조 그룹 마우스테튀퇴트(Maustetytöt)의 열연, 핀란드국립오페라 소속의 베이스인 미카 니칸데르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장면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미카 니칸데르를 ‘노래방 가수’로 표기하는 짓궂음으로 응수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집과 술집, 노래방과 같이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실내극의 무대는 명도가 낮은 원색이 재치 있게 배합되어 그리 시리게만 보이지는 않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공허한 공간들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북유럽의 조립식 원룸 아파트 구조는 인테리어를 삶의 과제로 불러들일 기회가 없는 인생의 고독을 발설한다. 그보다 장식과 인파가 들어찬 술집조차 음악이 끊긴 뒤의 고요까지 걷어내지는 못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실내는 그것이 심지어 이국적인 것으로 오해받아 때로 지나치게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는 순간에조차 한 꺼풀의 벽지를 벗기며 이면을 드러낸다. 안사가 누리는 찰나의 평화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전쟁 소식으로 중단될 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거실 식탁 위로 알코올중독에 관한 논쟁이 오갈 때 관객은 문득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놓인 창밖의 현실을 실감한다. 촬영감독 티모 살미넨은 곳곳에 푸른 조도를 부여해 어둑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균형이 거스르는 구도로 텅 빈 공간을 스크린에 남겨둠으로써 언제나 일말의 불안을 남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펼쳐진 길 앞에서 안사와 홀라파는 사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