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2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중앙대 교수 이충직
2002-06-12
예산을 소진하지 않고서는 진흥이 있을 수 없다

지난 5월28일 제2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힌 이충직(45) 중앙대 교수는 대외적인 활동이 크게 부각됐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90년대 중반 김동원 감독이 독립영화 비디오 제작으로 구속됐을 때 3인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했고, 스크린쿼터 사수운동 때 교단을 대표해 1차로 머리를 삭발했다. 인권영화제 일을 처음부터 꾸준히 해왔고, 영화법 개폐 운동을 비롯한 영화계의 현안이 있을 때 뒷전으로 물러서지 않고 해야할 일과 발언을 했다. 다만 공식직함을 걸고 나선 경우가 드물 뿐이다. 아울러 같은 중앙대의 이광모, 이용관 교수가 대외적 활동을 비중있게 할 수 있도록 학교 행정의 여러 일들을 처리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화계를 신구파로 나눈다면, 그의 입장은 분명히 젊은 쪽에 서 있지만 이번 영진위 위원장 호선 때 구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쪽에서도 이렇다할 반대가 없었다. 사람과 술 좋아하고 대인관계가 크게 모나지 않은 그의 기질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2기 영진위의 위원장 자리는 1기 때보다 훨씬 업무량이 많아졌다. 부위원장 자리가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위원장 가운데 가장 실세 위원장이 될 수밖에 없다. 편안한 인상이 자유인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 위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자유를 잃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 홍릉으로 향하고, 업무보고를 받고 현황을 파악하고, 영진위 위원장이 참석해야 하는 공식 행사와 관혼상제를 챙기고 나니 저녁 9시 뉴스가 끝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새벽 2시까지 영화를 보던 습관도 바뀌었고, 위원장이 된 뒤 술자리에 한번도 끼지 못했다.인터뷰가 있던 날도, 인터뷰 바로 뒤에 임금협상 등을 둘러싼 노조와의 약속이 잡혀 있어 마음이 바빠 보였다. 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연 것이 이제 겨우 두 차례. 아직 2기 영진위의 노선 같은 게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세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 힘듦을 이해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상업영화보다 독립·예술영화 지원을 강조하면서 “예산을 소진하지 않고서는 진흥이 있을 수 없다, 영화를 진흥하라고 책정된 예산을 보전하기에 급급해하는 건 일을 안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때는 단호한 원칙주의자 같은 표정이 읽히기도 했다.

위원장을 갑자기 맡게 된 것으로 아는데.

지금 같은 위원 인선 과정은 문제가 있다. 무슨 ‘007작전’도 아니고. 갑자기 연락받고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영진위에서 한번 활동해보겠다고 미리 나서면 물밑작업 한다고 하고, 아무런 준비없이 들어가면 또 그것도 문제라고 하고. 3기 위원회 인선 때는 정부가 미리 ‘준비 좀 해주십시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이 됐으면 좋겠다. 위원장직은 기왕 위원을 하겠다고 했으면, 좀더 책임을 갖고 해보자는 생각에서 나선 것이다.

2기 영진위 위원 중에 교수들이 많다보니 ‘교수협의회’라는 별명이 생겼다. 영진위 노동조합에서도 교수협의회로 전락해선 안 된다는 걱정어린 성명서를 내기도 했는데.

걱정 안 해도 된다. 현장을 나몰라라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세미나에 자주 참여해서 그런지 자유롭게 토론할 줄 안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따르는 합리적인 소통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원활한 업무 진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현장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도 좀더 객관적인 사업 집행을 가능케 할 것 같다.

그래도 제작·배급업 등에 종사하는 현장실무형 인사들이 빠져, 발빠르고 적극적인 지원의 공백이 불가피하지 않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답은 있다고 본다. 소위원회를 활성화해서 외부 현장 인력들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사안별로 전문가 간담회를 수시로 여는 방법 등이 있지 않나. 좀더 유기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영화 스탭들의 모임인 ‘비둘지둥지’에서 제기한 스탭 처우 문제 같은 건 본질적으로는 영진위가 나설 일이 아니지만, 스탭들과 제작자의 대화가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지난번 회의에서 기존 영진위 6개 소위원회를 개편, 재구성하는 문제가 논의됐지만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위원들과 함께 고민중이다.

2기 위원회의 역할 설정을 위해서라도, 1기 위원회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인데.

1기 영진위의 중요한 과제는 이전에 정부조직이었던 영화진흥공사를 민간조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조직을 민간화하는 데에 내부잡음이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러나 1기가 했던 구체적인 업무들에 대해선 솔직히 ‘잘한 건 뭐고, 못한 건 뭐다’라고 꼬집을 만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해해달라. 이제 1주일됐다. 개인적으로는 업무보고를 받았지만, 아직 다른 위원들은 업무 파악조차 못했다. 다음주부터 위원들과 함께 1기 위원회가 결정한 사업들의 집행이라든지 현안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을 열 것이다.

1기와 2기 사이에 한국의 영화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여건변화가 영진위의 중심사업에도 영향을 끼칠지.

그때의 영화산업은 수공업에서 막 벗어나려던 때였다. 그래서 산업적 형태를 구축하는 데 지원의 초점이 맞춰졌던 것 같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은 마케팅비가 제작비를 상회할 만큼 시스템이 갖춰졌다. 1기 때는 제작편수 증대를 위해 투자조합을 결성하고, 제작비를 지원했지만 이제 한국영화 시장은 영진위의 개입을 바라지 않을 만큼 커졌다. 2기의 주요 사업이 저예산영화, 독립영화, 애니메이션 등 비주류영화쪽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상업영화와 꼭 분리할 게 아니라, 비주류영화에 대한 지원 가운데 인력양성 같은 데에도 비중을 높인다면 그 인력들이 산업적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걸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기 위원회도 지난해 말 여론을 수렴해서 저예산영화전문투자조합, 시네마테크 전용관 확보 등의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는 소진성 예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변경 승인했고 이로 인해 한때 영화계에서는 영진위의 자율성을 훼손한 조치라는 비판이 강하게 일기도 했다.

바깥에서 말하는 것은 쉬운 것 같다. 나도 그때는 문화관광부가 영진위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들어와서 막상 이 부분을 정부와 협의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보니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문화부가 예산승인권을 갖고 있는 것이 영진위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진흥금고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정부가 약속한 1500억원의 금고는 내년까지 차질없이 모아지겠지만, 실제 가용할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된다는 점이 아쉽다. 서울종합촬영소가 큰돈을 벌어다주는 상황도 아니고, 문예진흥기금 또한 곧 폐지될 텐데.

비주류영화에 대한 지원은 아무래도 소진성 예산의 증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기 위원회 역시 정부를 설득하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

과실금만으로 지원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핵심사업에 소진성 예산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써야 한다. 진흥하라는 건 돈을 쓰라는 얘기다. 영화진흥에 책정된 예산을, 쓰기보다 보전하기에 급급해하는 건 일을 안 하겠다는 말이다.

소진성 예산으로 지원할 경우에는, 지원 대상 선정에 공신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물론이다. 1기 위원회도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애썼지만, 몇몇 사업에 있어 잡음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이번 출판사업지원 결과를 놓고서도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게시판에 오른다. 2기 위원회는 투명한 절차와 확고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다. 문제제기는 있을 수 있고, 대신 위원회는 심사가 공정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된다.

조직적인 차원에서 2기 영진위의 차별점은.

지난 영진법 개정으로 인해 부위원장이 비상임직이 되면서 사무국의 비중이 커졌다. 이건 1기 때와 달리 큰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1기 때는 위원들이 사소한 것까지 결정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그런 만큼 사무국은 소극적이 됐다. 정작 일해야 할 사람들이 손놓게 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시스템은 없지 않은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1기 위원들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2기 위원회가 그것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소소한 것까지 위원들이 결정하면, 나중에 현장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이 다 결정한다고 할 것 아닌가? 사무국이 좀더 열성적이고 창의적으로 사업을 제안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위원회가 최대한 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권한만큼 책임도 주어지겠고. 그러다보면 위원회는 취지 그대로 사업을 심의, 의결하는 몫만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기자들이 위원들을 찾는 게 아니라, 사무국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들을 먼저 찾게 되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2기 위원회의 안살림을 책임질 사무국장 인선 결과에 대한 관심이 높다.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다.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면 된다. 인간관계의 융화력도 뛰어나면 좋겠다. 내게 추천권이 있지만, 단순히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1기보다 위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엄청나게 많아졌다. 부위원장 역할까지 다 해야 하니까. 이제 1주일 했는데 피곤하고 힘들다. 공식적으로 챙겨야 하는 행사도 한두개가 아니다. 관혼상제 없는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그런 데에 다니는 게 익숙해져야 하는데 아직은 사람들 만나는 데에 여러 가지 신경이 쓰인다. 하다보면 나아지지 않겠나. 글 임범 isman@hani.co.kr·이영진 anti@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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