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사는 6살 소녀 클레오(루이즈 모루아 팡자니)의 세계는 두 어른의 슬하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한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의 자리를 든든히 채우려는 아빠 아르노(아르노 레보티니)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클레오의 낮과 밤을 채우는 유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가 그 둘이다. 특히 글로리아는 클레오와 매일 등·하원을 함께하고 안과에 가 안경도 맞추는 등 클레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어느 날 글로리아는 모국으로부터 가족의 비보를 듣고 클레오에게 작별을 고한다. 짧은 삶 동안 두번의 상실을 겪은 클레오는 떠난 유모를 그리워하다 문득 방학이 되면 아프리카의 섬나라 카보베르데로 놀러 오라던 글로리아의 말을 기억해낸다. 그해 여름 클레오는 카보베르데에 가 새로운 세상을 접한다. 이국의 낯선 풍습과 풍경도 클레오의 세계를 넓히지만 카보베르데의 체류 동안 클레오가 만난 글로리아의 가족과 유모가 아닌 생활인 글로리아의 모습 또한 클레오에겐 온통 새롭기만 하다. 클레오가 보기에 출산을 앞둔 글로리아의 딸 페르난다(아브나라 고메스 바렐라)는 엄마가 되길 꺼리는 듯하고 글로리아의 어린 아들 세자르(프레디 고메스 타바레스)는 갑자기 한집에서 지내게 된 클레오가 마뜩잖은 눈치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페르난다의 아이가 태어나고 글로리아의 가족은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대부분의 시간을 몰두해 있다. 클레오는 어쩐지 아기에게 글로리아를 빼앗긴 것만 같아 공연히 심술이 난다.
<클레오의 세계>는 제목이 명시하듯 꼬마 클레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다. 영화의 촬영과 편집은 무구한 클레오의 시점을 그대로 투사한다. 촬영은 딱 클레오의 눈에 비칠 법한 프레임을 담아내고 편집은 꼭 클레오의 뇌가 처리할 법한 인지 속도로 장면을 배열한다. 영화가 배치한 아이의 세상을 어른의 시각에서 쉽게 재단하려 들지 않는 연출의 숙고가 돋보인다. 촬영과 편집의 공은 클레오를 둘러싼 어른들을 묘사할 때도 빛을 발한다. 영화 초반 클레오와 각각 놀이하는 글로리아와 아르노의 몇 시퀀스는, 주 양육자인 두 어른이 얼마만큼 다른 정감과 힘을 가지고 클레오를 기르는지를 카메라의 무빙과 편집의 속도만으로 관객에게 별개로 인지시킨다. 오프닝 시퀀스를 포함해 몇 차례 삽입되는 추상 수채화 애니메이션 또한 <클레오의 세계>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시점 주체가 명확한 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어떤 캐릭터의 시점인지 모호하게 처리돼 있다. 하지만 관객은 애니메이션 앞뒤에 덧붙는 플롯의 배치를 통해 눈부시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누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시점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인생의 물살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가슴 한켠이 뭉클해질 것이다.
“클레오, 노래는 모두의 것이란다.”
글로리아가 자기에게만 불러주던 자장가를 손주에게도 불러주는 걸 목격한 클레오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심통이 난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위 대사를 건넨다. 아직 어린아이를 채근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독점만으론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삶의 지혜를 자상하게 건네는 글로리아의 태도가 사려 깊다. 아마도 먼 훗날 클레오 또한 글로리아로부터 들은 자장가를 다른 누군가에게 불러주지 않을까.
CHECK POINT
<특송> 감독 박대민, 2020
<메리 포핀스>(1964)에서 <로마>(2018)까지. 서양 영화사에 수많은 유모가 존재할 수 있었던 데엔 대부분의 관객이 유년기에 유모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기 때문일 터다. 해외영화를 통해 유모의 개념을 습득한 한국 관객들에게 한국영화 속 유모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지만, <특송>의 은하(박소담)는 어쩐지 한국영화 속 좋은 유모로 자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은하는 위험천만한 카 체이싱 속에서도 끝까지 낯선 아이인 서원(정현준)을 지켜내려 분투한다. 마침 박소담 배우는 <기생충>에서 한 차례 정현준 배우를 교육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