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성장은 생존형, <킬러들의 쇼핑몰> 김혜준
2024-01-17
글 : 이자연

삼촌 진만(이동욱)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동안 지안(김혜준)은 그가 남긴 정보 공백 사이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질주시킨다. 무기상, 킬러, 방탄, 벙커…. 생전 생각해본 적 없던 생경한 단어 앞에서 지안은 안개 속을 더듬거리듯 삼촌이 남긴 말들을 맞춰나갈 뿐이다.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삼촌이 사라진 지금, 지안은 머릿속에 만개한 물음표를 뒤로한 채 자신의 본능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킬러로서의 감각을 하나씩 깨워가면서 지안의 세상은 전복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에서 장녀 콤플렉스를 지닌 중전으로 대중과 가까워진 김혜준은 영화 <미성년> <싱크홀>, 시리즈 <구경이> <커넥트>를 통해 독특하고 기묘한 여자들의 얼굴을 부지런히 그려왔다. 김혜준의 확장이 곧 캐릭터 다양성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범한 표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인지해가는 지안의 순간들은 김혜준의 것으로 새롭게 재탄생한다. 가장 낯설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건 지안만이 아니다.

- 시나리오 속 지안이를 처음 어떻게 받아들였나.

= 첫인상이 강렬했다. 지안이가 타고난 것들이 매력적이었다. 지안이는 삼촌의 피를 물려받아 킬러의 자질을 갖췄고, 상황에 따라 그것이 새어나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깨달아가는 지안의 성장 과정이 눈에 띄었다. 평범함 속에 잠재된 비범함도 좋았다. 그래서 이런 점을 중점에 두고 캐릭터를 구축하려 신경 썼다.

- 지안 캐릭터를 꼼꼼하게 준비한 것 같다.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안이의 이것만큼은 나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다면.

= 지안이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번뜩이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인지해가는 과정이다. 드라마 안에서 이 찰나를 섬세하게 잘 살리는 게 중요한 미션이었다.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내 같은 반응이지 않게, 오로지 놀라기만 하지 않게 그리려 노력했다. 짧지만 강렬한 전환점들.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지안이는 삼촌의 죽음 전후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평소에는 “아 뭔 소리야~” 하는 말을 장난스럽게 던지던 지안이지만 진만이 세상을 떠난 뒤로 한껏 어두워지고 말수가 줄어든다.

= 지안이의 감정 변화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나타내려 했다. 지안이는 삼촌과 유대감은 있지만 그렇게 가깝지 않다. 그래서 삼촌의 죽음이 무척 갑작스럽고 그 뒤에 벌어지는 일들에 혼란스러워한다. 이 과정을 순차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정직하고 심플하게 연기하고 싶었다. 그 안의 생략된 관계나 서사를 일부러 엮어내려 하지 않았다. 지안이의 평소 모습을 생각해도 비밀스러운 구석을 보여주기보다 주어지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지안이는 삼촌만큼 정보가 없는 사람이니까 상황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는 조급함이 필요하다.

- 지안이는 어떤 성장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나.

= 생존형 성장. 벼랑 끝으로 내몰리다 보면 갑자기 좋은 수가 나오기도 하지 않나. 자기 내면 저 밑바닥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지안이는 살기 위해 성장한다. 아기새가 살아남기 위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지안이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확장한다. 사람들도 이렇게 처절한 지안이를 응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희망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모습에서 나오는 용기에 전염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안이를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희생하는 모습에서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명감과 뜨거운 마음이 느껴진다. 관계성에서 비롯한 위로와 울림이 크다.

- 타인에게 감정과 기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지안이는 삼촌의 장례를 치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된 것을 실감한 뒤에야 눈물을 터뜨린다.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 분출하는 건 배우 김혜준의 무기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 대한 기억이 궁금하다.

=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지안이가 빈 소파를 조용히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 뒤에 삼촌에 대한 기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데, 그 과거 회상 장면을 바로 며칠 전에 촬영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안이 느꼈을 공허함과 상실감을 더 현실처럼 느낄 수 있었다. 회상 장면을 찍으면서 눈에 담아두었던 삼촌의 모습을 떠올리니 지안이의 무너지는 마음이 내 것인 것처럼 와닿았다. 사실 대본 순서대로 촬영하지 않기 때문에 몰입하기 어려운 순간도 종종 있다. 초반에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다. 지안이의 고독감을 체감하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기도 하고. 하루는 몰골이 처참한 지안이로 분장하고 촬영 대기를 하는데 갑자기 분장감독님이 나를 보더니 “아이고, 지안이 너무 안쓰럽다~” 하셨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갑자기 지안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날은 그 한마디로 연기했다. 내가 너무 안쓰럽구나, 하면서. 감정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려 공들이는 편이다.

- 이번 작품에선 박지빈 배우와 페어로 함께 나선다. 호흡을 맞춘 과정은 어땠나.

= 박지빈 배우가 맡은 정민은 뛰어난 해킹 능력으로 쇼핑몰의 정체를 파헤친다. 그런데 이 역할이 너무 매력적이라 지빈에게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내가 남자였으면 정민 역에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 같아”라고. 배우라면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역할이다. 지안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 <킬러들의 쇼핑몰>을 비롯한 <구경이> <커넥트> 등 최근 3년 동안 맡은 작품을 돌아보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역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선역이든 악역이든 자기 할 일과 목표를 지닌 인물을 좋아한다. 비중은 상관없다. 자기 주도성과 주체성을 지닌 인물에 끌린다. 도전하는 장면이 한 장면이라도 있다면 함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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