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배 한척으로 시작한 해운회사로 목포의 유망한 청년 사업가가 된 김대중. 일찍이 자기 성취를 거둔 듯 보이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방향에 있었다. 바로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광복과 한국전쟁, 분단의 역사와 독재정치를 가로지른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청춘 선거> <노회찬6411> 등 일상의 정치를 주요하게 다뤄온 민환기 감독은 <길위에 김대중>을 통해 개인이나 사업가, 투사나 사상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을 집중 조명한다. 납치, 살해 위협, 투옥과 사형선고 등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굴곡은 민주주의가 일상화·보편화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거쳐야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시각 자료와 음성 자료, 영상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김대중이 그려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궤를 깊이 있게 풀어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소임을 다한 김대중의 일생을 담은 민환기 감독을 만났다. 인터뷰 뒤편에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김수민 정치평론가의 에세이가 이어진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모략받았지만 가장 추모와 애정을 받는 정치인이 된, 흥미로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다. 처음 기획 단계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 2021년에 처음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땐 내가 정치에 고관여층도 아닌 터라 많이 망설였다. 그럼에도 제안에 응한 이유 중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를 찾은 영상 자료를 보았을 때였다. 그때 충격받았다. 그를 반기는 사람들의 눈빛과 시민들의 환호를 잊을 수 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뜨겁고 열광적인 반응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어떤 시대적 배경과 시민들의 열망이 반영된 현상일까. 이 질문의 답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영화를 기획했을 때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의 삶과 행보를 정리하고자 했다. 김대중을 공부하면 할수록 투사나 사상가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웃음) 하지만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노력을 정치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두 일관돼 보였다. 또 이를 보는 사람들도 정치인에 대한 이해도가 과거보다 더 유연해진 것 같다. 지금이 좋은 시기라 생각했다.
- 영화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영상, 음성, 시각 자료 등이 인상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자료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나.
=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었다. 사실 자료를 구하는 데엔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그보단 워낙 자료가 많다 보니 이를 어떻게 정리할지, 무엇을 빼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다. 그다음으로 신경 쓴 건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였다. 김대중평화센터에서 대통령 퇴임 후 자체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관여하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김대중을 돌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김대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화 러닝타임상에서 1시간 즈음 지나갈 때 챕터가 전환되는 형식으로 조성했다. 앞을 담백한 사실 위주로 보여준다면 그 뒤에는 김대중의 결정과 선택을 파고든다.
- 제작 과정에서 “영화가 정치적으로 치우진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진 관객을 염두에 두기도 했나.
= 당연히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그래서 초반 60분은 담백하게 접근하려 했다. 어떤 장면에서는 야박해 보일 정도로 사실 기반으로 구성했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사실 이상의 접근은 영화적으로도 흥미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정책들을 주요하게 다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략가에 가깝다. 정책을 만들 때 국민들이 호응하면서도 효용성과 실용성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향토예비군 폐지는 시민들이 그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 정책이었다.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과 같은 이상적인 정책도 놓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바탕을 성실하게 쌓아올린 거라 볼 수 있다.
- 김대중 납치사건, 유신선언, 계엄령과 긴급조치 선포, 사법사상 암흑의 날 등 민주주의 탄압의 역사를 연대기에 따라 보여준다.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근현대사의 민주주의 역사를 둘러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 당시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의 흐름이다.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뜨거워졌다. 그사이에 이 흐름을 끌고 간 인물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바람을 공유했다. 그래서 영화에도 중간중간 시민들의 얼굴을 담았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갈증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방향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대중의 생을 따라가다 보니 국민들의 열망이 자연스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목포 선거에서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천명이 기다렸다는 게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60년대에 천명이라니.
-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아쉽지만 영화에 담지 못한 게 있다면.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이 듣기 좋다. 그런데 너무 길다. (웃음) 어떤 것은 2시간이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연설의 의미를 전달하려면 앞뒤 맥락을 연결할 수 있도록 일정 분량 이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자칫하면 영화가 지루해질 수 있겠더라.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뺄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구석이 있어 유머지만 유머처럼 들리지 않고, 일갈이어도 일갈처럼 와닿지 않는 것들이 있어 냉정하게 판단했다.
- 지금 이 시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를 본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 정치에 인물도 중요하지만 여기 오기까지 무엇을 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전문화된 사회인 만큼 이제 정치인도 전문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특정 사안과 인물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필요한 질문조차 건너뛰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고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