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비평] 곰은 우리 안에 있다, <노 베어스>
2024-01-31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첫 장면부터 정교하게 통제된 롱테이크다. 이러면 자파르 파나히가 아니지 않나. 행상이 지나간 상점가 이면도로에 거리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잠시 전 지나쳐간 행인이 카페테리아에 앉으면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는 다른 손님에게 맥주를 낸 뒤 남자와 만나 긴 대화를 나눈다. 삼각대 위 카메라가 360도 돌아가는 가운데 인물들은 철저히 계획된 동선에 맞춰 나오고 빠진다. 느린 패닝숏은 얼핏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솜씨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반대다.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카메라에 맞춰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컷” 하는 음성과 함께 영화 촬영 현장임이 드러난다. 이어 화면은 촬영장을 맥북으로 들여다보며 원격 연출하는 감독의 어깨 뒤로 커팅 없이 빠진다. 여기서부터는 카메라가 인물을 뒤쫓는 쪽이다. 테이크는 7분에 육박한다. “전문 편집자의 기술”(감독의 전작 <3개의 얼굴들>의 대사)이다. 노트북 안과 밖이 얽히고 영화와 영화 속 영화가 설킨다. 연출 금지령이 내려진 감독의 처지가 그 사이를 넘나든다. 이를 두고 경계를 흐린다고만 말한다면 겉핥기가 될 것이다. <노 베어스>는 서로 다른 계(界)가 서로를 연루(engagement)시키며 얽힘(entanglement)을 만들어낸다. 자연스러운 듯 인위적인 이 오프닝은 그의 전작에 비해서도 몇 걸음은 나아간 화두를 던진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따라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인가. 영화가 현실을 따르는가 아니면 현실이 영화를 만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는가.

영화가 자신과 논박을 벌인다

우리는 어느 한쪽에도 속하기 어렵다. <노 베어스>는 만나기 어려운 두 평행선을 부여잡은 채 길항하는 경계인의 몸부림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앞쪽 대열에 선 자의 처절한 움직임이다. 극 중 조연출 레자(레자 헤이다리)에게 박티아르(박티아르 판제이)의 동선을 지시하는 감독(자파르 파나히)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배우들 위치가 안 맞잖아. 배우들 서는 자리를 정확히 알려줘. 박티아르가 화면에서 나간 다음….” 이것은 파나히가 아니다. 파나히가 연기하는 <노 베어스>의 캐릭터다. 인물 동선에 따른 리듬감을 중시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파나히는 지금 자문하는 중이다. 그간 자신이 연출한 움직임을 진실된 이미지라 주장해왔던 것은 아닌가. 극 중 감독은 원격 연출을 위해 촬영 장소와 가까운 국경 마을에 집을 빌렸다. 2010년 당국으로부터 영화 연출 금지령이 내려진 뒤 제작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 이후, 그가 처한 현실은 줄곧 영화와 병렬 연결되며 간섭하고 교섭해왔다. 직접 택시를 몰며 승객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영화를 찍지 못하는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내놓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전까지 감독의 처지는 이란 사회의 모순과 인습을 언급하는 수단에 좀더 가까웠다. 이번엔 그의 현실이 작품 내부에서 스스로 논박을 벌인다. 그렇게 때로 주저하고 멈칫거리다 끝내 다른 영역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이란 정부가 그를 억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게 됐을까. 짐작하건대 <써클>(2000)이나 <오프사이드>(2006)의 연장에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아스가르 파르하디보다 한결 정치적인 작품을 잇따라 내놨을 것 같다. 대신 지금처럼 서스펜스가 가득한 형식 실험, 자신이 만든 움직임과 그 이미지에 대한 비판 가득한 성찰, 무엇보다 이렇게나 치열하게 스스로와 토론하는 영화를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글에서 극 중 파나히 감독을 실존 인물 파나히와 구분하기 위해 ‘파나히2’로 부르기로 하자. 극중극에서 자라(미나 카바니)와 박티아르 커플은 망명하기 위해 위조 여권을 구한다. 실화 소재다. 파나히2의 제작진이 실제 밀입국을 시도하는 이들을 섭외해 촬영한다는 설정이다(미나 카바니와 박티아르 판제이는 전문 배우다). 제작진은 박티아르와 공모해 자라에게 “누군가 분실한 여권을 가져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난민을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여권을 훔치고 위조하고 중개하는 범죄 조직이 있을 것이다. 제작진은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란과 튀르키예 사이의 국경지대, 밀수업자와 인신매매범들이 오간다. 영화 제작을 금지당한 파나히는 원격 연출을 위해 이곳에 머무는 중이다. 마을 주민들은 순박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국경의 지하경제에 의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나히2에게 숙소를 빌려준 집주인 간바르(바히드 모바세리)는 도시에서 비싼 차를 몰고 온 엘리트 감독에게 더없이 친절하지만 이웃들과는 그를 의심하는 대화를 나눈다. 그들 역시 국경수비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처지다. 파나히2는 짬이 날 때마다 서브 카메라로 마을 주민들을 촬영하는데, 이때 마을 총각 야굽(자바드 시야히)과 정혼한 처녀 고잘(다르야 알레이)이 다른 남자 솔두즈(아미르 다바리)와 함께 있는 모습이 사진기에 담긴 것으로 의심받는다.

감독이 자신을 전선으로 내몬다

실제로 사진이 찍혔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파나히2는 마을 주민들을 여기저기 찍고 다녔고 파나히는 파나히2의 피사체를 관객이 볼 수 없도록 프레임 밖에 뒀다는 게 중요하다. 파나히2는 캐논과 소니 제품 각 1대씩, 2대의 카메라를 갖고 있었지만 문제의 사진을 내놓으라는 주민들에게 “SD카드는 한장뿐”이라고 말한다. 이 마을에 왜 왔는지, 밤새 어디를 다녀왔는지를 사실과 다른 말로 둘러대야 함은 물론이다. 그는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진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믿던 마을 촌장은, 파나히2가 지역 전통에 따라 ‘맹세의 방’에서 사진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이때 파나히2는 코란 대신 카메라에 대고 맹세하기로 한다. 영화감독에게 카메라란 코란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파나히는 지난 10여년간 파나히2를 카메라 뒤가 아닌 앞에 세우는 방식으로 칸, 베를린, 베니스 등지를 오가며 세계에 ‘진실’을 알려왔다. 최소한 그렇게 여겨졌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몰아붙이며 자신을 카메라 앞 심문대에 세운다. ‘피고’를 자처한 영화감독은 자신의 말을 카메라로 녹화하면 증거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맹세 자체가 앞뒤 맞지 않는 낡은 관습이란 걸 자신도 알고 관객도 안다. 감독은 다시 묻는다. 시각 증거라는 이유만으로 진실의 기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국의 감시를 피해 작업해온 자신의 영화들은 대체 무엇인가.

관객은 줄곧 파나히2를 파나히와 동일시하며 봐온 참이다. 파나히가 파나히2를 집중 추궁한다. 영화가 영화 속 영화를 코너로 내몬다. 고잘과 함께 야반도주를 약속한 청년 솔두즈는 “대화로 해결하라”며 어설픈 조언을 내놓는 영화감독에게 따진다. (합리적인)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다. 위조 여권의 실체를 알게 된 자라는 감독에게 등을 돌린다. 투옥도 고문도 견뎠지만 자신을 가짜로 만든 건 참을 수 없다고 말이다. 감독의 정체성과 진실성을 정면으로 의심한 두 사람은 끝내 주검으로 돌아온다. 감독의 전작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혹한 심문이다.

더욱이 파나히2는 이들의 시신을 차 안에서, 혹은 차 안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내다볼 수 있다. 파나히는 국경을 넘을 수 없고 파나히2는 차에서 내려 애도할 수 없다. 처지를 직시한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차를 세운다. 그리고 주차 브레이크를 당긴다.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어.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촬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2022년 7월, 파나히는 당국에 체포돼 6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영화의 한쪽 최전선에서 한 걸음을 더 뗀 감독은, 그렇게 자신에게 닥쳐올 현실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해 9월 이란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번져나갔다. 영화는 종종 현실에 앞서고 현실은 늘 영화를 압도하고 만다.

파나히가 파나히에게 따져묻는다

<노 베어스>에서 촬영 행위는 사태를 촉발시키고 분란을 부를 뿐 문제 해결은 하지 못한다. 도리어 갈등과 폭력, 죽음에 연루된다. 전작 <3개의 얼굴들>만 해도, 죽음을 담은 듯 보였던 휴대폰 카메라는 어려움을 겪는 청년 여성 앞으로 감독을 이끄는 이로운 도구였다. 카메라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끝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인물 앞에 멈출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교행이 불가능한 낭떠러지 마을길을 넓히기 위해 직접 삽을 들 줄 아는 인물이다. <노 베어스>에서는 휴대폰을 든 채 지붕 위로 가면 훔쳐본다고 오해받을까봐 사다리에 오르지 못하고, 집주인은 사촌이 말을 함부로 할까봐 카메라 레코딩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실수로 정지 버튼 대신 레코딩이 눌렸을 때, 포장되지 않은 진실은 불신을 싹틔우고 카메라에 담긴 전통 의례 장소는 죽음의 공간이 되어 돌아온다. ‘맹세의 방’에서 파나히2는 카메라로 사태를 무마하려다 속마음을 드러내 갈등을 키운다. 그의 카메라는 사실을 담았지만 진실을 알리지는 못한 채 의심, 불안, 오해를 부른다. 이란으로부터 지구 저편, 자본주의가 폐허를 이룬 어떤 선진국에서 이를 보는 관객이라면 문제를 고발하고 나아가 해결하려는 카메라쪽에 더 마음이 갈지 모른다. 하지만 후티 반군에 순항 미사일을 지원하는 무리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을 체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정부와 동일 세력인 사회라면 얘기는 다를 것이다. 그렇게 파나히는 자신뿐 아니라 영화가 저항의 무기라고 믿는 관객에게조차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도시는 부패한 정부가 문제고 우리 마을은 미신이 문제지요.” 파나히2가 ‘맹세의 방’으로 가기 직전 골목길에서 만난 한 노인의 말이다. 길에서 곰이 나올 수 있으니 같이 가자고 붙든 사람이다. 극 전체에서 본 적도 없고 이후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놓고는 “곰은 우리를 겁주려고 꾸며낸 것”이라며 이른다. “세상에 두려움을 만들면 권력을 휘두르기 쉽거든요.” 나는 이 노인이 파나히2를 만나러 온 파나히가 아닐까 생각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올 수도 있고 불신이 낳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론 그릇된 확신이, 때론 진실되지 않은 방식으로 연결된 사실들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노인-파나히는 곰 이야기를 먼저 꺼낸 다음 스스로 말을 바꾸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는 어떤 곰이 들어 있는지 질문하게 해준다. 사태를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따져묻고 논란을 촉발하는 카메라를 통해, 영화는 인간 사회 곳곳에 어슬렁거릴 곰의 발자국을 되짚는다. 그렇게 파나히는 멀찍이 진보한 다음 감옥에 갔다. 최소한 2028년까지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의 미로 속 어딘가에서 곰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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