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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노 베어스>
2024-02-14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튀르키예를 벗어나 유럽으로 망명하려는 자라는 자동차에 타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고 가발을 벗는다. 그녀는 남편 박티아르에게 전달받은 여권을 들고 멈춰 선다.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모니터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는 연출자 자파르 파나히에게 외친다. “우리 삶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죠?” 파나히의 대답. “맞아요.” 자라의 질문. “그런데 이건 뭐죠?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박티아르의 여권이 유효하지 않은 위조 여권이라고 밝힌다. “모두 가짜잖아요. 우리가 가짜가 됐다고요.” 자라는 지금 연출자가 ‘해피 엔딩’을 위해 배우들의 삶을 가짜로 조작했다고 항의한다. 이 장면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노 베어스>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혹은 자파르 파나히가 원격으로 연출하는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의 장면, 동시에 박티아르와 자라가 처한 현실을 소재로 삼은 허구적 영화의 일부분, 그러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은 ‘가짜’ 장면.

명확한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허구적 가설은 끝없이 이 장면의 주변부를 맴돈다. 어디까지가 계획된 픽션에 속하고, 어디까지가 현실인 걸까? 현장을 이끄는 조감독 레자는 위조 여권을 받으러 간 박티아르와 밀수업자가 만나서 대화하는 순간을 촬영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카메라가 촬영하지 못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쩌면 자라의 항의와 파나히의 대답이 모두 촬영 중인 영화의 일부분인 것은 아닐까? 이 장면의 표면적 형식과 정보만으로는 어떤 진실도 식별할 수 없다. 연출자의 눈과 동일시된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 바깥을 증언하지 못한다. 수많은 픽션의 가능성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자리에서 자라는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돌아본다. 그 몸짓이 멈춰 선 자리는 화면 안팎의 세계가 간직한 이중성을 보존하는 좌표다.

자파르 파나히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장면은 두편의 영화, 혹은 한편의 영화와 하나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관련된 논쟁이)다. 물론 파나히에게서 키아로스타미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손쉬운 연상이다. 파나히는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 생활을 거쳤으며, 키아로스타미가 그랬던 것처럼 이란의 아동 청소년 지능계발센터인 카눈 스튜디오에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영화로 연출 작업을 시작했다. 두 작가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복잡한 존재론적 지위를 전제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픽션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면에서 교란되는 영화의 가능성을 공유한다. 특히 2003년 이후로 이란 정부에 의해 구속과 가택연금과 출국금지 처분을 받으며 끊임없이 영화 제작을 제재받아온 파나히에게 ‘현실에 개입하고,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영화’라는 문제는 무엇보다 강력한 시의성을 호소한다. 하지만 <노 베어스>의 한 장면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주제와 문제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비밀과 거짓말

첫 번째 참조대상은 <클로즈업>(1990)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클로즈업>에서 몇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제시되는 법정 장면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의 유명 영화감독 모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한 혐의로 재판받는 후세인 사브지안이라는 남자를 향해 카메라를 세워둔다. 연출자의 시선이 카메라 프레임에 담긴 사브지안을 포착하면서, 거짓말이 금지되는 맹세와 증언의 공간에 영화라는 픽션이 틈입한다. <클로즈업>에서 사브지안은 유명 감독을 사칭하던 자신의 거짓말을 재연하는 동시에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법정에 선다. 픽션을 되풀이하면서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이 된다. 거짓 없는 증언이자 모호한 재연으로서의 영화. 법정에서 사브지안은 카메라 뒤에 있는 키아로스타미를 향해 말한다. “감독님이 내 관객이에요.” 그 순간에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는 사브지안이 마련한 허구적 진실에 참여하는 공모자의 자리에 선다.

<노 베어스>에서도 연출자의 카메라는 법정을 닮은 ‘맹세의 방’에 선다. 마을 사람들은 파나히에게 묻는다. 호두나무 아래서 구잘과 솔두즈라는 젊은 남녀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지 않았느냐고. 마을 청년 야굽은 태어날 때부터 구잘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솔두즈가 구잘을 사랑하고 있고 파나히가 촬영한 두 사람의 사진이 그 증거가 될 것이라 말한다. ‘맹세의 방’에 도착한 파나히는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라며 카메라를 세워두고 증언을 시작한다. 그러나 야굽은 화를 내며 카메라의 기록이 무의미하다고 항의한 뒤 밖으로 나가버린다. <클로즈업>에서 법과 증언과 거짓말의 테두리 안팎에서 울려 퍼지던 픽션의 가능성은 <노 베어스>에서 무너진다.

다른 하나는 <텐>(2003)이다. 움직이는 자동차의 시동을 멈추면서 끝나는 <노 베어스>의 마지막 장면은, 두대의 카메라를 운전석과 조수석 앞에 두고 촬영한 장면들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즉각 상기시킨다. <텐>은 오직 자동차에 앉은 사람들의 비밀스럽고 내밀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 제도권 안에서의 영화제작이 불가능해진 파나히는 ‘자동차 안의 영화’라는 단순하고도 급진적인 원칙을 받아들여 <택시>를 만들기도 했지만, <노 베어스>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텐>의 형식 바깥에 있는 문제를 가리킨다. 실제 삶에서 가져온 상황을 연기하는 인물이자 배우로서 카메라에 담긴 여성이 남성 연출자에게 항의하는 순간을 담아낸 <노 베어스>의 한 장면은 불가피하게 <텐>을 둘러싼 논쟁적 사건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이란의 영화감독이자 <텐>의 주연배우인 마니아 아크바리는 <텐>에 사용된 장면 대부분이 자신의 사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촬영된 러시필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아크바리는 키아로스타미가 교묘한 거짓말과 조작으로 자신의 영화를 훔쳤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란 내부에서도 그녀의 폭로에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텐>

<클로즈업>이 거짓말의 공모라면, <텐>은 진실의 도둑질이다. 그러나 이 표현이 키아로스타미와 <텐>을 비난하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적 논쟁과 별개의 맥락에서, 마니아 아크바리의 폭로는 영화적 픽션이 성립하는 최종적인 위치를 질문케 한다. 영화는 언제 만들어지는가, <텐>은 어느 시점에 완성된 영화인가. 여기서 <텐>을 둘러싸고 있는 정확한 사실관계를 규명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키아로스타미와 파나히의 영화가 의식적인 의도를 넘어서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의제를 환기하고 싶다.

그들의 영화는 ‘영화감독이 장면을 촬영한다’라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만한 간단한 명제로부터 ‘영화’는, ‘감독’은, ‘장면’은, ‘촬영’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까다로운 반문을 발췌한다. 카메라 뒤에 있는 연출자는 화면을 매개로 피사체를 바라보고 반응하며 빼앗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유죄와 공모하는 것인가? 영화는 촬영과 편집의 단계를 거친다. 이 당연한 문장은 완성된 영화가 촬영되지 않았거나 편집 과정에서 버려진 장면들과 총합을 이룬다는 뜻을 함의한다. <노 베어스>에서 파나히는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견고한 구조를 받아들이는 대신 영화의 표면에 남겨지는 미완성의 흔적, 불완전한 구멍에 접근한다. 그 흔적과 구멍은 영화의 질서를 위태롭게 흔든다. 이란과 튀르키예 국경지대의 시골 마을에 머무는 파나히는 집주인 간바르에게 카메라를 빌려주고 마을의 약혼식 행사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카메라 조작에 서투른 간바르가 정지와 녹화를 반대로 누른 탓에 촬영되었어야 할 영상과 버려졌어야 할 영상이 뒤바뀐다. 파나히의 영화와 간바르의 영화가 뒤얽히고, 버려졌어야 할 것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는 <노 베어스>는 연출자와 카메라와 배우들의 결합으로 행해지고, 원하는 것들을 취사선택해 완성되는 영화제작의 특권적 절차에 의문을 가한다.

주관적 증인의 화면

박티아르와 자라의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이 진행 중인 <노 베어스>의 첫 장면에서 화면이 서서히 넓어지면 노트북 모니터의 경계가 보이고 배우와 조연출을 바라보는 자파르 파나히의 뒷모습이 보인다. 출금 금지로 이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자파르 파나히는 노트북 화상 중계로 박티아르와 자라의 영화를 지켜본다. 하나의 화면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스크린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과 결합해 있다. 화면에는 언제나 보는 자의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노 베어스>에서 스크린 속의 세계와 보는 자의 시선은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 된다.

영화의 중반부, 박티아르가 길거리에서 자동차와 부딪쳐 차에서 내린 남자와 시비가 붙는 장면이 나온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이 장면 뒤로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자파르 파나히의 모습이 연결된다. 이 편집은 미묘한 트릭으로 관객인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지켜본 논리대로라면, 박티아르가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는 장면 역시 연출된 허구에 속한다. 여러 사람의 액션이 과도하게 연출된 이 장면을 영화 속의 또 다른 영화로 받아들이기도 쉽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파나히의 시선은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한다. 두 장면은 영화제작이라는 일관된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확증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장면을 이어붙였을 뿐이다. 파나히가 바라본 모니터에 무엇이 있는지 영화는 증명할 수 없다. 짓궂게도, 모니터를 바라보던 파나히에게 찾아온 마을 사람들의 질문도 이와 같다. 당신은 호두나무 아래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습니까? 영화는 그 사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전통적인 맥락의 몽타주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의 충돌과 연결과 확장을 가리킨다. 하나의 장면 뒤에 다른 장면이 붙고, 그 장면들의 결합이 의미를 만들어낸다. <노 베어스>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발산의 몽타주’라고 이름 붙일 만한 또 다른 의미작용을 시도한다. 파나히의 몽타주는 장면과 다음 장면의 결합이라는 수평적 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면과 그 장면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연결하는 수직적 관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 베어스>의 화면은 주관적 증인을 요구한다. 우리는 카메라가 바라본 대상이 무엇인지 증언하는 증인의 자리에, 그러나 영화가 무엇을 바라보았는지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무능력한 증인의 자리에 도착해 있다.

자동차가 멈추는 자리

<클로즈업>

증인을 요구하는 화면은 보는 이들을 스크린 내부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사건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연루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을을 떠나는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 창문 사이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간바르는 구잘과 솔두즈가 국경을 넘다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파니히는 시동을 멈춘다. 자동차가 움직임을 멈추면 영화도 화면을 끝낸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노 베어스>에는 자동차가 움직임을 멈추는 세번의 중단이 찾아온다. 첫 번째 중단. 한밤중에 마을로 돌아오는 파나히의 자동차를 구잘이 멈춰 세운다. 그녀는 파나히에게 호두나무 아래에 있던 자신과 솔두즈의 사진을 찍었느냐고 물어본다. 영화를 통틀어 오직 이 장면에만 나오는 구잘은 살해당한 시체로 마지막 장면에 되돌아온다. 두 번째 중단. 튀르키예를 떠나는 장면을 찍는 순간에 자라는 걸음을 멈추고 자동차에 탑승하지 않는다. 자라는 거짓된 ‘해피 엔딩’을 만들려는 연출자의 의도 바깥으로 나서고, 바다에 빠져 자살한 시신으로 도착한다. <노 베어스>에서 반복되는 자동차의 중단은 영화적 운동의 운명과 겹친다. 자동차를 멈추는 행위는 픽션을 위협적으로 중단시키는 현실의 개입이다. 그리고 마지막 중단이 기다린다. 이제 우리가 마음 편히 지켜볼 허구적 피사체는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켜보는 화면에 떠오른 것은 자파르 파나히,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무언가를 바라본 당신이기 때문이다.

파나히는 카메라로 촬영한다. 호두나무 아래서 구잘과 솔두즈가 함께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원격 통화로 박티아르와 자라의 영화를 연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죽음으로 되돌아온 자들의 흔적 앞에서 파나히는 ‘컷’을 외친다. 그는 기계장치를 매개로 촬영되는 세계를 말없이 지켜보는 관조적 연출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노 베어스>는 구조적 대칭을 이루는 한장의 사진(구잘과 솔두즈의 사진)과 한편의 영화(박티아르와 자라의 영화)를 매개로 어느 쪽에도 완벽히 속할 수 없는 영화에 책임을 묻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은 구잘도, 자라도 아닌 자파르 파나히다. 이 숏에서 그는 화면을 관찰하는 증인일 수도, 촬영 현장을 통제하는 감독일 수도 없다. <노 베어스>의 연출자인 자파르 파나히가 이 영화에 출연하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요구한 자리를 되돌아본다. 국경지대를 넘을 수 없기에 촬영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직접 서 있을 수 없는 자리,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연출자의 위치에 있을 수 없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화는 실패한다. 카메라에 비친 피사체들은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카메라를 든 시선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유죄다. 남은 것은 책임의 자리다. 왜 영화는 유죄일 수밖에 없는가? 왜 영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자파르 파나히는 자동차를 멈추고 죽어버린 앞선 두 사람처럼, 자동차의 시동을 끈다.

반복하건대 <노 베어스>에서 영화는, 시선의 개입 없이도 성립하는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의 화면은 증인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두운 극장에서 모습을 숨기며 파나히의 영화를 훔쳐볼 수 없다. 자파르 파나히의 마지막 장면은 스크린을 쳐다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되돌린다. 영화가 유죄라면, 당신은 누구‘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러므로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어두워진 뒤에도 질문은 기각되지 않는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이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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