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에 직면한 일본의 근미래, <플랜 75>는 75살 이상의 노인에게 정부가 죽음을 적극 지원하면서 펼쳐지는 사건을 각기 다른 입장에 선 네명의 인물을 통해 그려나간다. 아무리 안전한 범위 안에서 상상을 해봐도 서늘하고 섬뜩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빛과 어둠이 스며든 얼굴을 통해 건조하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어낸다. 개봉 일정에 앞서 서울을 방문한 하야카와 지에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는 영화로 보다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성심껏 말을 건넸다.
- 이미 옴니버스영화 <10년>(2018)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을 연출한 바 있다. 처음 연출하는 장편영화 역시 <플랜 75>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 <플랜 75>의 원래 기획은 장편이었다. 2017년 무렵부터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당시 프로 스탭들과 일해본 경험도 없고 프로듀서를 맡을 사람도 없었다. 아이디어는 있지만 어떻게 영화로 만들 수 있을지 방법을 전혀 모르던 때 우연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다는 영화 <10년>의 기획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일단 이 영화를 단편으로라도 꼭 만들어보자고 생각해 먼저 단편을 만들게 되었다.
- <플랜 75>의 오프닝 시퀀스는 2016년 일본 요양 시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 실제 일어났던 사건에서 범인이 했던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장애인들은 사회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살 가치가 없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미 사회 전반에서 생산성으로 목숨과 존재의 가치를 매기는 인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이런 풍토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라 생각하니 위기의식을 느꼈다. 사회적 약자에게 너그러움이 없는 사회를 향한 분노가 내 안에서 일었다. 이전에 연출한 단편에도 고령자인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내 관심사가 반드시 윗세대를 향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플랜 75>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대상을 장애인이 아니라 고령자로 정했던 이유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늙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관객들이 자기에게 일어날 수도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 세세한 설정의 단편 버전과는 달리 장편 <플랜 75>에서는 은근한 방식으로 죽음을 암시한다. 접근 방식을 달리하게 된 이유는.
= 각본을 집필하던 시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했다. 질병이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죽음이라는 사태는 전세계에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 되어버렸고 죽음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아주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된 것이다. 이미 어둡고 암울한 시기에 내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직접 건드리는 영화를 만든다는 상황에 저항감마저 들었다. 또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2016년에 실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과 관련한 사람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첫 시퀀스에서 일부를 아웃포커싱으로 촬영해 최대한 우회해 연출하려 주의를 기울였다.
- 사진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빛과 어둠을 상당히 섬세하고 엄격하게 다루고 있는 듯 보인다.
= 빛을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삶의 아름다움을 빛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스크린을 통해 빛이 가진 따스한 성질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처음부터 촬영감독과도 이야기했다. 이주노동자인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가 등장할 때의 야외 장면은 오로지 자연광으로만 촬영했다. 실내 장면은 거의 모든 장면이 조명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연출한 것이다. 주인공인 미치(바이쇼 지에코)가 영화 초반에 등장할 때만 해도 따스한 분위기이지만 영화가 뒤로 향할수록 무기질 공간으로 향하는 것만 같은 차가운 느낌으로 연출하는 데 집중했다. 장편을 연출한 경험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 촬영감독, 조명감독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그들에게 거의 맡겨두었다. 다른 영화 현장에서 조명 세팅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 모르겠지만 3주간의 짧은 기간 내에 촬영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오히려 부족했다.
- 이 영화를 상상에 기반한 근미래 영화로 믿게 만드는 데 미치 역의 주연배우 바이쇼 지에코의 아름다움이 한몫하는 것 같다.
= 존재만으로 살아온 인생을 상상해볼 수 있는 배우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으로서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미치는 78살에 계속해서 일을 하면서 혼자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이다. 바이쇼 지에코는 관객들이 미치가 정말로 있을 법한 인물로 여길 만한 현실감도 지니고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각본을 보여드렸더니 먼저 나를 만나보고 난 후에 역할을 맡을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감독을 위해서 배우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먼저 만남을 주선했고, 그 프로 의식에 굉장히 감동받았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미치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배우라고 여겨 캐스팅을 결정했다.
- 첫 장편을 연출하면서 앞으로 연출할 영화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이 확대되거나 깊어졌을 것 같은데.
= 요즘 두 번째 장편영화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데 <플랜 75>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가족영화다. 첫 장편을 촬영하고 난 후에 영화는 감독이 혼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부담감은 많이 없어진 상태다. 다음 작품을 촬영할 때는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