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게 뭐야?” 블랙아웃의 화면 위로 던져진 첫 질문이다.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입을 빌려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성공한 한 여성의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객을 유혹하는 미끼일 뿐이다. 미끼의 떡밥으로 배를 채울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궁금증을 관객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추락의 해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빈틈, 진실의 자리
작가 산드라와 그 작품 세계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 조에(카미유 루더퍼드)의 인터뷰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음악을 크게 틀면서 중단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을 통해 자신이 중단시킨 인터뷰를 지속시킨다.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하겠다던 약속은 그렇게 지켜진다. 조에와 인터뷰에서 산드라는 좀처럼 주도권을 잃지 않고 마치 답할 것과 답하기 싫은 것을 취사선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삶의 법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조에라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을, 조에 앞이라면 산드라가 결코 밝히지 않았을 삶의 편린들이 낱낱이 까발려진다. 그것도 조에가 실패한 녹음의 형태를 통해서 말이다. 삶의 법정에서 진행되는 가혹한 인터뷰에서 산드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에서 이뤄지는 공방전은 상당한 흡인력이 있다. 2시간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도 법정에서의 논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이 법정 장면에서 이상한 점은 산드라가 사뮈엘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타살과 자살의 가능성을 각각 주장하는 두 전문가의 진술이 차례로 이어질 때 이미 어느 정도 판가름나는 데도 불구하고(두 증언에 비교해보면 타살의 가능성은 현격히 낮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전개 방향은 산드라가 범인일 가능성을 높여나가려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추락의 해부는 두 전문가의 진술 이후 사뮈엘의 죽음이라는 ‘표면적인 추락’에서 산드라라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여성을 추락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정신과 상담의의 진술과 녹음 파일 등을 통해 검사가 보여주려는 것은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였다는 증거의 제시가 아니다. 그는 사뮈엘에겐 자살의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산드라의 부도덕성을 부각하며 타살에 걸맞은 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사뮈엘의 녹음 파일이 재생되는 장면은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차지할 만큼 영화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녹음 파일에 담긴 산드라는 외도한 여인이자 양성애자이고, 심적으로 위축된 남편을 거칠게 몰아세운 냉혹한 부인이며, 아들의 양육도 남편에게 미룬 이기적이고 괴물 같은 엄마에다, 작가가 되고 싶은 남편의 꿈마저 빼앗은 표절 작가다. 검사의 주장의 대부분은 산드라의 부도덕성에 집중하며, 부부의 갈등은 산드라 탓이다, 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의 한 장면은 그 순간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더 많은 삶의 국면을 제유적으로 대변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날카롭게 상처내던 말다툼이 그날 하루의 예외적인 사건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사실이 부부로서 함께 살아온 삶 전부를, 그리고 산드라라는 인물 전체를 대변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뮈엘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몇 사실을 두고 벌이는 해석의 대결이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에서 펼쳐지는 논쟁의 매력은 법정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뮈엘의 추락사의 원인(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보다는, 산드라의 삶에서 발견된 사실의 편린을 바탕으로 각자의 서사를 만들려는 산드라(와 뱅상)와 검사(와 그의 동료들)간의 대결에 있다. <추락의 해부>에서 ‘작가 산드라’와 가장 닮은 이는 그녀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쪽 사람들)처럼 보인다. 검사는 산드라의 삶에서 발췌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인자 산드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를 써내려간다. 중요한 것은 발췌된 사실에 허구적 상상(또는 해석)을 덧붙이며 완결된 서사를 완성하는 과정이 작가 산드라의 작품 세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품을 써왔던 산드라는 검사의 서사 앞에서 작가에서 등장인물로 위치가 전환된다. 산드라는 검사의 서사에 결코 동의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모친의 죽음을 다룬 산드라의 첫 번째 소설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녀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소재로 두 번째 소설을 쓴다). 산드라(와 뱅상)는 검사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한 ‘허구의 세계’ 또는 ‘살인자 산드라’라는 인물 앞에서,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서사를 완성해야 한다.
<추락의 해부>에서 쥐스틴 트리에는 사뮈엘의 죽음이 추락사인지 아니면 살인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미리 제공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법정 스릴러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각자의 논리와 해석으로 사실의 암흑 지점, 또는 사실과 사실 사이에 놓인 빈틈을 각자의 서사로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사뮈엘의 죽음에 대해 각자가 완성한 허구적 가설로서의 서사는 진실의 이명이다. 시각에 손상을 입은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네르)이 세상을 제한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진실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출현한다. 그것은 완전무결하기보다는 언제나 빈틈을 가지고 우리의 판단을 기다린다. 산드라와 사뮈엘이 영어라는 타협의 언어로 의사소통해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사이에서 불완전하게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타인의 의사를 전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잔드라 휠러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추락의 해부>의 잔드라 휠러의 얼굴은 의뭉스럽기만 한 진실과 닮았다. 흐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형상. 잔드라 휠러는 다채로운 표정을 얼굴에 새기기보다 법정에 입고 나온 무채색의 옷만큼이나 단조로운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사뮈엘이 녹음한 사운드가 법정을 채울 때 산드라의 (무)표정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만약 산드라의 그 무채색의 얼굴이 없다면, 그것을 뚫고 터져나온 두번의 울음, 그리고 자신이 남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검사의 주장에 일그러진 얼굴로 외투를 벗어젖히는 찰나의 순간에 기꺼이 ‘그녀의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흡인력이 그토록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쥐스틴 트리에는 또 다른 한편에 관객이 그녀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하는 관계를 배치한다. 뱅상과의 관계. 영화는 산드라와 뱅상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보이는 것 그 자체로 남겨두지만, 그럼에도 재회의 순간부터 흘렀던 에로틱한 텐션은 남편의 정신 상담의의 증언이 있던 날 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장면의 마무리는 어떤 상황이 뒤에 전개됐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을 거쳐 무죄가 선고된 날의 식사 장면까지 계속된다.
빈틈, 관객의 자리
산드라는 타인(주로 가족)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성공한 작가다. 모친의 죽음, 부친과의 불화, 그리고 아들의 사고가 산드라의 소설에 끌려나온 현실의 일부다. 하지만 법정에서 산드라는 타인이 자신의 현실의 일부를 서사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산드라(와 뱅상)는 그 서사에 맞서 또 다른 서사를 주장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산드라는 작가라기보다는 등장인물에 가까운 위치로 추락한다. 산드라는 자신의 삶을 더이상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산드라는 뱅상과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법정에서 할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을 지시받는 위치에 선다. 쥐스틴 트리에는 그렇게 걸러진 말들만 떠들어야 하는 산드라의 입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는다.
녹음 파일이 법정에 재생되는 장면에서 쥐스틴 트리에는 여러 방식의 마스킹을 통해 사방이 꽉 막힌 좁은 프레임을 활용하고, 그로 인해 산드라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법정에서 산드라는 방청객에 앉아 있는 다니엘쪽으로 곧잘 시선을 돌리는데, 그때마다 등장하는 다니엘의 시점숏(또는 오더더숄더숏)은 산드라를 중심인물로 하는 ‘서사 대결’의 승자를 판단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영화 초반부에 산드라를 인터뷰하던 조에는 현실의 사건인 아들의 사고를 묘사하는 것이 독자를 불편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관객은 이에 대한 산드라의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영화는 다니엘이 스눕을 씻기기 위해 물을 트는 장면으로 잠시전환한 후, 다시 인터뷰 현장으로 되돌아가 독자는 자신이 쓴 책 속으로 들어간 거라고, 독자가 책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산드라의 모습을 비춘다. 쥐스틴 트리에는 이 짧은 편집을 통해 다니엘이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정도로만 우리에게 그 현장의 소리를 듣게 함으로써 관객과 다니엘을 등가적으로 위치시킨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자리에 대한 산드라의 생각이 쥐스틴 트리에가 <추락의 해부>에서 구현하려는 관객(또는 독자)의 자리를 지시한다는 점이다. 쥐스틴 트리에는 독자가 책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뮈엘이 유언처럼 건네준 이야기를 법정에서 증언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렇게 법정의 청자(또는 독자)였던 다니엘은 서사의 일부가 된다. 아니, 사뮈엘과 산드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서사를 완성한다. 관객은 다니엘의 ‘판단’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다니엘의 증언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그 순간, 관객 스스로가 다니엘과 동일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세상, 자명한 사실로 가득한 세상이라면 진실은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서 보이지 않는 암흑 지점, 또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틈이야말로 진실이 거주하는 장소다. 그 빈틈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몫이다. 청자, 또는 독자로서 다니엘에게 부여되었던 과제는 영화의 종결 이후 관객의 몫이 되고, 관객은 그렇게 영화의 일부가 된다.
<추락의 해부>에는 다섯번의 플래시백, 또는 시각적 번역(재연)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과거의 한순간을 회상하는 누군가의 기억이라기보다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번역(재연)하는 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특히 네 번째 장면, 그러니까 사뮈엘이 녹음한 파일이 법정에서 재생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시각적 재연은 사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녹음 파일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사운드만으로 산드라와 사뮈엘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될 때까지로 한정된다. 산드라와 사뮈엘 사이에서 어떤 폭력적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시각적 재연이 중단된다. 사운드는 어떤 폭력적 상황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어떤 행위를 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뱅상은 빈칸은 빈칸으로 놔두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법정에서 사뮈엘의 죽음에 관련된 빈틈을 채우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다니엘 앞에 놓인 가장 큰 빈틈은 사뮈엘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이 빈틈을 마주하며 사뮈엘이 유언처럼 남긴 이야기를 떠올린다. 또는 지어낸다. 다섯 번째 시각적 재연에서 사뮈엘의 얼굴에 다니엘의 음성이 겹친다. 우리는 그 진술이 사뮈엘의 것인지 다니엘의 것인지 확정할 수 없다. 마치 마지막 증언 전까지 무엇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다니엘처럼 말이다. 관객은 다니엘과 사뮈엘 사이, 그리고 산드라의 무죄선고 이후 다니엘이 보여주는 눈물과 미소 사이의 빈틈 속에 위치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빈틈이 관객, 또는 독자의 자리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한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산드라가 쓴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허구가 현실을 부수도록 지난 흔적을 감추는 게 나의 일이다.” 산드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되돌려받는다(만약 다니엘의 증언이 허구였다면, 그는 산드라의 이 신념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일 것이다). 재판은 끝났고, 산드라는 이겼다. 하지만 산드라는 작가로서 이 신념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허구를 통해 현실을 부수던 자에서 허구에 의해 현실이 부서지는 경험을 된 이후에도 산드라는 과거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는 작가로 남을 수 있을까? 작가로서 산드라가 어떤 세계를 그려나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녀가 누군가를 꼭 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재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산드라는 다니엘과 대화를 나눈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이뤄진 첫 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