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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향수의 시대에 찾아온 현재의 영화, <바튼 아카데미>
2024-03-06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주의 사항: 이 영화는 인물의 깊은 슬픔을 보존·전달하기 위해 유머를 충전해 포장하였음.

노스탤지어의 시대다.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하기 어려울 때 종종 과거를 떠올린다. 자존감 높은 자는 그저 오늘 할 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후회를 한다. 비전이 있는 사람의 가설은 지금을 설계하는 데 쓰이지만 미래가 불안한 사람의 가정법은 지난날들을 헤맨다.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사회의 자존감이 낮아질 때, 공동체가 비전을 찾아내지 못할 때, 구성원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삼는 영화·드라마는 그래서 자주 과거로 향한다. 저때 저 쿠데타 세력을 처단했어야 하는 건데, 저때 저 대통령이 재평가를 받았어야 하는 건데…. 과거시제 가정법은 간혹 성찰적이어서 의미 있지만, 대개는 선별적인 탓에 일시적 위안이나 선동에 머물고 만다. 수많은 웹툰과 TV시리즈의 주인공들이 초자연적으로 시간을 되돌리거나 신분이 뒤바뀌거나 아예 환생으로 판타지를 실현할 때, 누군가가 짧은 위로를 얻는 사이 누군가는 긴 허무에 빠진다.

이렇게 자존감과 과거의 상관관계를 놓고 보면, 노스탤지어는 양극화와 승자독식이 기본값인 현대의 유행병이라는 학자들의 진단이 이해된다.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 교수인 스베틀라나 보임은 “향수란 상실과 전이의 감정이지만, 자신의 판타지와 교감하는 로맨스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향수병은 21세기 들어서면서 일시적 질병에서 치유할 수 없는 현대 조건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보임은, 향수를 ‘삶과 역사적 격변의 리듬이 가속화된 시대의 방어기제’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레트로토피아>(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에서 재인용). 이렇게 21세기를 향수의 시대로 규정한 석학 바우만은 “미래에 더 좋아질 거라는 대중의 희망에 투자하기보다 그 희망을 흐릿하게 기억되는 과거, 추정된 안정성과 그로 인한 신뢰성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과거에 다시 투자하기로 한 셈”이라고 현대의 속성을 짚는다.

헌집 줄게, 새집 다오

1970년 겨울 미국 뉴잉글랜드의 한 사립학교. <바튼 아카데미>는 70년대식 관람등급 표기에 이어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영화사 미라맥스(1979년 설립)와 포커스 피처스(2002년 설립) 로고를 당대 느낌이 물씬하게 재디자인해 화면에 띄운다. 디지털로 촬영해놓고 1.66 대 1의 좁은 화면비에 셀룰로이드 필터를 적용해 필름룩을 구현했다. 한겨울 을씨년하게 쌓인 눈, 그럼에도 얼어붙지 않은 하천의 물줄기와 함께 약 9분 동안 오프닝크레딧이 이어진다. 중장년 남성 성장담 전문가인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자신만의 <굿 윌 헌팅>을 만들고 싶었다면 굳이 70년대 초로 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10대 후반 소년들의 합창을 우두커니 듣고 있는 듯한 이 프롤로그가, 베트남전의 피로감이 절정을 넘어서는 한편 닉슨 대통령 집권 2년을 지날 무렵의 풍경이란 사실을 우리는 조금 뒤에야 상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전쟁의 망령 속에서 할리우드 호러의 고전들이 태동하던 당시, 미래세대의 활기와 당대의 엄혹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의 시공간은 ‘지금은 노스탤지어의 시대’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꺼낸 다음 이제부터 현재를 이야기해보겠다는 감독의 절박한 선택이었을 터다. 두껍아 두껍아, 바야흐로 향수의 시절이야. 그러니 나는 조금 새로운 얘기를 들려줄게.

자신의 작품 연보에서 이례적으로 5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 페인 감독이 노스탤지어를 활용하는 방식은, 화면에 드러내지 않고도 징집에 대한 공포와 같은 당대 공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시대와 개인 사이의 모순을 감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요 인물들의 결핍이 하나둘 발견되면서 이들의 관계를 지켜보는 관객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자연스레 마음 쓰게 된다. 오스카 트로피를 닮은, <사이드웨이>(2004)의 교사 마일스(폴 지어마티)의 방에 놓인 조각상을 <바튼 아카데미>의 폴 허넘 선생(폴 지어마티) 집무실에 세워둔 영화적 조크는 얼핏 이 영화를 마일스의 20년 뒤 이야기로 여기게 해주지만, 이번 작품은 페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페인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은 남성의 자아 찾기라는 축에서 벗어나지 않아왔다. 페인의 남자들은 옥신각신하는 상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아내가 자신을 떠났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어바웃 슈미트>(2002), <디센던트>(2011), 심지어 근미래 배경의 최근작 <다운사이징>(2017)까지 모두 그랬다. <바튼 아카데미>를 이 연장에서 바라본다면 영화의 포장만 보는 셈이다. 전작들과 달리 세명의 주인공은 극 중 동등한 비중을 갖고 감독으로부터 서로 다르지 않은 배려를 받으며, 윗세대는 배움을 나눈 뒤 자아를 내려놓음으로써 아래 세대의 앞길을 터준 다음 길을 떠난다. 중장년 백인 남성이 아닌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래가 없다고 여기는 시대에 세상을 품는 그릇을 넓히려는 감독의 고민이 역력하다.

향수의 시대에 되짚는 어른의 자리

최근 미국영화들에서 어른이란 무엇인지 걱정하는 흔적들이 자주 보인다. <그랜 토리노>의 노인은 이웃집 아시안 청년이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도록 스스로를 희생했다. <탑건: 매버릭>의 교관은 기계에 사람의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애쓰며 친구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미사일 앞으로 자신의 전투기를 몰았다.

<바튼 아카데미>의 선생님은 제자가 전쟁터로 내몰릴 위기를 막기 위해 평생 지켜온 직업을 버린 채 학교를 떠난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회일수록 마음 챙김이 유행하고 공정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공정이란 무엇인지 더 묻게 마련이다. 공직자가 제 역할을 못하는 나라에서 할 일을 해내는 공무원이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에서 진정한 어른을 보여주는 서사가 자주 등장한다. 미국은 올해 78살이자 명백한 범죄자인 전직 대통령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가운데 82살에다 정신이 종종 혼미한 현직 대통령 말고는 이를 상대할 유력 후보가 없는 나라다. 내려놓는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을 말하는 작품으로서 이 영화의 원제는 The Holdovers, ‘남겨진 자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크리스마스 연휴에 각자의 사정으로 학교에 남게 된 이들을 가리키는 제목이지만, 세 주인공의 인생사에 남겨진 사연을 알아가는 관객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그 중심축에 학교 급식실 주방장 메리(데이바인 조이 랜돌프)가 있다. 그녀는 베트남전에서 아들을 잃었다. 당시 미국 동부의 사립학교들은 부잣집 자제들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함으로써 징집을 피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었지만 메리의 아들은 이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제대하면 받을 수 있는 군 보조금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참전했다가 목숨을 빼앗겼다. 메리는 때로 까칠하고 대부분 덤덤하게 주변을 대하기 때문에 관객은 자칫 그녀의 슬픔을 간과하기 쉽다. 영화가 메리로 하여금 다음 세대를 임신한 여동생을 찾아가 포옹하고 쉴 시간을 허락하는 장면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아 그 고통에 미처 마음 쓰지 못했던 관객에게 미안한 감정을 안긴다. 메리 캐릭터가 특별한 이유는 중장년 백인 남성의 애환과 성장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진솔함으로 무장시켜 수작을 만들어온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한달음에 확장시킨 데 있다. 커다란 슬픔과 담담한 희망을 한몸에 담아내는 메리 캐릭터의 조형은, 유머와 비통함 사이에서 이 영화의 균형을 단단히 잡아준다. 질소로 포장된 스낵 봉지 안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 온전한 모양의 바삭함이라면 이 영화의 유머 안에서 누릴 것은 인물의 깊은 슬픔을 충분히 전달받고 공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거대한 결핍이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메리에 비해, 앵거스(도미닉 세사)와 폴의 결핍은 서로의 그것을 모르다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타인을 재정의해주는 도구가 된다. 결핍 없는 인간이란 없을 텐데도 세상은 종종 이를 숨기고 살 것을 말없이 강요한다. 극 초반의 에피소드에서 엄지장갑 한쪽을 잃어버린 소년은 나머지 한쪽까지 내던져버린다. 짝짝이 장갑처럼 결핍이 눈에 띄는 것보다 아예 보이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앵거스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죽었다고 둘러대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하다. 극 중 메리가 즐겨보는 TV 퀴즈쇼는 출연자들이 배우자의 일상 습관이나 취향 등을 알아맞히는 프로그램이다. 저런 걸 모르고 있었네, 가까운 인물들이 서로를 얼마나 알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장면은 퀴즈쇼만의 얘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핍을 모르면 사립학교 학생들을 “평생 복에 겨워 살아온 애들”로 범주화하게 마련이다. 타인을 싸잡아 범주화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혐오에 빠지기 쉬운지 우리는 종종 그 사례를 본다. ‘흑인은 범죄를 잘 저지를 것이다’ , ‘동남아 사람은 잘 씻지 않아 지저분하다’ 등등.

폴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이유는 트리메틸아민뇨증이라는 내분비계 질환을 앓기 때문이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신의 병명을 알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정을 모르는 타인들은 제멋대로 냄새의 원인을 추측하고 상상한 다음 단정 짓는다. 당사자는 체념하고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앵거스가 외사시(外斜視)인 폴의 눈을 보며(폴 지어마티는 특수 제작한 불투명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사실상 한쪽 눈을 보지 못하는 채로 운전과 주차 장면까지 연기했다) 어느 쪽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지를 묻는 대목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모호하게 미워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심 가져야만 편견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음을 되새기게 된다. 각자도생의 틈바구니에서 자꾸만 과거를 도피처 삼게 되는 시대에, 63살의 페인 감독은 한 남자의 자아에 초점 맞춰온 자신의 영화 세계로부터 벗어나 공동체 구성원인 모두에게, 특히나 기성세대를 향해 다정한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만큼의 정부를 갖는다”는 말을 남긴 고대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이런 말도 했다고, 폴이 전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Non nobis solum nati su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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