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를 보고 난 뒤 혼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엇을 기준에 두고 영화를 판단하거나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오컬트 장르에 초점을 두는 것이 무난하지만, 분명 캐릭터 무비의 성격이 보다 도드라진다. <검은 사제들>에서 하나의 집단으로서 두 사제가 보여주었던 앙상블이 <파묘>에 이르러 도무지 섞일 것 같지 않은 이들에게서 발휘된다. 결혼식 단체 사진을 찍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사의 주문에 의해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서게 된 이들의 위치는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묘한 균형을 이루는 별자리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멀고도 가까운 그 미묘한 거리감과 위치 선정이 <파묘>의 본질임을, 마지막 장면은 말하는 것 같다.
화림(김고은), 봉길(이도현), 상덕(최민식), 영근(유해진) 등 4명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은 전사에 의해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쿨하게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이란 뜻이다. 무속, 풍수, 장례 등 몸담은 일은 각기 다르지만, 직업인으로서 서로를 신뢰한다. 의인들에게서 따온 것이 명백한 고전적인 이름과는 달리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격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4인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쿨한 태도로 일관한다. 기본적으로는 ‘돈’으로 움직이지만, 최소한의 측은지심도 느끼하지 않게 드러낸다. 프로페셔널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도 한다. 그 실수가 이들을 죽음과 가까운 자리로 몰아가지만, 결국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둔 위치와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1. 당사자의 약화
장재현 감독의 전작과 비교할 때, <파묘>에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당사자 위치의 약화다. <사바하>에서 박 목사(이정재)를 제외한 금화(이재인), 정나한(박정민), 김제석(유지태) 등 주요 인물들은 모두 중심 사건의 연루자였다. 비교적 비당사자에 초점을 맞췄다 할 <검은 사제들> 역시, 부제 최준호(강동원)의 트라우마를 제시하며 그를 간접적으로 연루된 자에 위치시켰다. 반면 <파묘>에서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건 바깥에 위치한 자들이다. 이들의 개인적인 사정은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상덕의 딸이 결혼을 앞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가족관계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당사자의 약화와 해결사의 부상은 고전적 오컬트 장르와 비교해도 두드러지는 차별점이다. <엑소시스트>에서 귀신 들린 소녀가 몸을 거꾸로 뒤집은 채 계단을 내려오는 애크러배틱한 동작이 오컬트 영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도, 오컬트가 악령과 소녀를 위한 장르임을 드러낸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서 악령 혹은 신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는 소녀의 몸에 깃들었다. 소녀는 다룰 수 없는 것을 다루기 위한 장치이자, 가장 강한 것이 가장 약한 것에 들었을 때의 충돌과 파괴력을 드러내는 하나의 무대였다. <파묘>의 아기는 소녀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지만, 그는 더 큰 충격적 이미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사자에 집중된 침투 형태를 중단하기 위해서 마련된 존재 같다. 부유한 집에 태어난 아기는 몸에 줄을 연결한 채 병원 침대에 놓여 있지만, 독방에 전담 간호사를 둘 만큼 부유하다. 아픈 기색도 없이 살집이 오른 천진한 아기는 냄새 나는 병실에서 몸을 포박당한 환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기 곁에는 눈물 짓는 가족조차 없다. 젊은 어머니가 화림과 봉길을 대하는 태도는 어쩔 수 없는 가운데 지푸라기라도 잡듯 기대는 간절함이 아니라, 어디 할 테면 하라고 테스트하듯 잔뜩 경계하는 차가운 눈길이다. 약화된 것은 악귀 역시 마찬가지다. <파묘>에 이르러 악귀는 이성으로는 판단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대상처럼 보인다. <검은 사제들>의 악령이 불특정한 인간의 몸에 옮겨붙을 수 있던 것과는 달리, <파묘>에서 조상은 자기 핏줄만을 찾아가거나 괴롭힌다. 덧붙여 영화는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감정적이나 서사적으로 몰입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의뢰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LA에 사는 부유한 미국인이며, 친일파 할아버지를 둔 자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대물림되는 고통은 특수한 것으로 밀쳐질 뿐만 아니라 나쁘게는 그럴 만하다는 인식마저 은밀히 맴돈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악귀가 손자를 노리는 장면만큼은 흥미진진했다. 호텔에 있던 의뢰인이 전화기 속 상덕의 목소리와 문 밖의 상덕의 목소리 중 어느 쪽을 진짜라고 믿을 것인가 시험에 드는 장면이다. 소리의 차원에서 전화 목소리는 가깝고, 문밖의 목소리는 멀다. 반면 실제 거리의 차원에서 전화 속 몸은 멀고, 문밖의 몸은 가깝다. 그럼에도 의뢰인이 문밖의 몸 대신 전화기 속 존재를 믿고 그의 지시에 따라 창문을 열었다가 변을 당한다.
악귀를 묘사하는 데 있어 또 다른 주목할 지점은 목소리와 언어다. 악귀가 인간의 몸에 들어간 증거는 기괴한 표정과 행동의 차원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악귀는 목소리와 언어를 바꿀 수 없기에 이들의 목소리와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 중요했다. <검은 사제들>에서 악마는 라틴어, 중국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기에 이를 이해하는 사제가 필요했다. 반면 <파묘>에서 악귀는 다른 인간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낼 수 있기에 번역자도 매개자도 필요 없다.
2. 몸의 위기와 대면의 비현실
혼령은 인간의 몸이라는 매개를 건너뛴 채 원하는 곳을 향해 곧바로 직진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혼령은 LA에 있는 아들과 증손자에게도 나타나고, 한국에 있는 손자에게도 나타난다. 혼령은 거울과 창문 등 무언가를 비추는 것을 매개 삼아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매개는 혼령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표출할 강한 몸을 노리던 악령이 매개하는 몸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혼령의 문제가 아닌 보는 자들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혼령은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면이 가능한 혼령은 혼령이 사물에 붙어 진화한 형태로서의 정령이라고 명명된다. 이름 없는 묘에 묻힌 관에서 한참 더 흙을 파고들어갔을 때야 수직으로 묻혔던 관이 나오고, 그 안에서 일본 무사 정령이 깨어난다. 그는 초인간적인 거대함으로 대상을 압도하면서 목을 비틀거나 간을 빼내어 인간을 죽인다. 노인의 혼령이 오컬트 영화의 맥락에서 무난히 안착한 것과는 달리 정령의 존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인간을 공격하는 정령의 행태를 묘사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은유 혹은 상징으로 읽어야 할까. (오컬트라 부르든, 판타지라 부르든) 장르적 익스큐즈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선에서 이미지는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파묘>가 정령을 그리는 방식은 데이비드 라워리가 <그린 나이트>에서 녹색 기사를 그린 방식과 일정 부분 유사하다. <파묘>의 설명을 대입해보면 녹색 기사는 나무에 붙어 진화한 형태의 정령으로 목이 잘려도 죽지 않았다. 데이비드 라워리가 녹색 기사를 그래픽에 의한 허구적 이미지에만 기대지 않고, 유치하고 조악한 이미지로 굴러떨어질 위험 속에서도 실제의 중량감을 지닌 존재로 구현했듯이, 장재현 감독 역시 흡사 <전설의 고향>의 어색함으로 굴러떨어질 위험에도 무사 정령을 중량감 있게 그린다. 정령의 거대함은 잃어버린 인간의 몸을 압도한다. 정령을 표현하는 방식은 비슷하되, 정령의 성격은 두 영화에서 판이하게 갈린다. <파묘>의 정령은 녹색 기사처럼 엄정한 규칙을 제시하는 솔선수범의 자기 파괴형 리더도 아니고, 여느 오컬트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몸을 노리는 악령도 아니다. 정령이 노리는 것은 잠복할 건강한 몸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데 있다.
인간의 몸은 영화의 서사 안에서는 물론, 오컬트 장르를 놓고 보았을 때 위기에 처해 있다. 매개로서 인간의 몸은 불필요해졌고, 말을 전달할 수단으로서도 쓰임을 잃었다. 이는 단지 개별 영화에서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 체계 전반에서 몸이 처한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비교의 대상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MBC에서 방영된 가상현실(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시리즈다. 2020년 첫 방영된 뒤 1년에 한편꼴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의뢰인이 죽은 가족과 VR의 세계에서 다시 만나는 모습을 담는다. 시즌을 거쳐오면서 VR을 통해 실제의 모습을 구현하거나 성장한 모습을 구현하고, 대상에 반응하거나 대화도 가능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에 관한 복잡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만남에 공감하고 몰입할수록 실제의 몸을 이미지가 대체하는 양상 역시 수용하게 된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장치와 환경이 뒷받침된다면 기술을 통해 VR에 접속하기가 어렵지만은 않게 된 지금, 보이지 않는 존재와 소통하는 무속이 지닌 특권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인이 장재현의 오컬트 세계의 전면에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의 영화에서 무속인은 늘 등장해왔지만 한번도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검은 사제들>에서 무당은 신병을 앓는 이를 치유하는 데 굿이 별 효력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사바하>의 오프닝에 등장한 무당 역시 호기롭게 불길한 곳에 발을 들였다가 뱀에게 발을 물린 채 불명예스럽게 퇴장한다.
화림이 보여준 굿판은 무속에 관한 보통의 인식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는 하늘의 뜻이나 죽은 이의 영을 받아 의뢰인에게 대신 전달하는 빙의자나 번역자가 아니라, 영리하게 신을 속이거나 다룰 수 있는 자로 그려진다. 전통악기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경을 읊고,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은 돼지의 피부를 칼로 베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도회적인 의상을 즐겨 입는 그는 패션 무당이자, 표면의 무당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화림의 굿판은 주인공들이 몸의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과도 직결된다. 몸을 지키는 무기는 강인한 내면 같은 것이 아니라, 몸의 가장 바깥에 위치한 취약한 피부다. 혹은 일시적인 피부로서 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다. 봉길의 문신은 그를 간신히 구한다. 병실에서 행해지는 엑소시즘에서도 봉길의 발바닥에는 한자어가 새겨진다. 화림, 상덕, 영근이 이름 없는 묘를 다시 찾았을 때, 정령의 침투를 피하기 위해 한 것도 얼굴 위에 한자어를 빼곡히 새겨넣은 것이다.
3.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컬트?
<파묘>는 고통받는 기괴하고 일그러진 당사자의 오컬트가 아닌, 바깥에 선 자들의 오컬트다. 이들은 어떤 일에 연루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외인부대, 혹은 특정 사건의 해결을 위해 뭉친 히어로에 가깝다. 이들은 각각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영적인 것과 소통하는 화림과 그를 돕는 봉길, 풍수지리에 능통한 상덕, 상례에 능통한 영근까지 이들은 모두 죽음과 소통하는 능력자들이다. ‘겁나 험한 것’과 싸우고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이 특수한 어벤저스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파묘>가 오컬트의 외피를 쓴 히어로영화임을 보증한다. ‘이것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컬트인가?’라는 자문에 확답을 내리긴 힘들어도 적어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컬트를 상상하게 한다. 전통, 과거, 역사, 무속, 죽음, 장르는 세상이 변해도 그대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맹렬하게 파헤쳐지고 뒤집어진다. 묘를 파헤치고 이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예기치 않은 혼란은 바로 이 지점을 드러낸다.
주목하고 싶은 건 영화가 실제 역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항일 혹은 반일의 코드들은 의도적인 삽입이 분명하지만, 여기에서 파생된 정신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보다는 오컬트를 한국 영토에서 파생된 본질에서 발견하고자 애써온 감독이 가닿은 하나의 시간대라 보는 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 우리는 역사영화임을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고도 역사를 다루는 하나의 사례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판타지이지만, 누군가가 적극 부인하지 않는 한 역사물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영화는 실제 역사와 비교한 어떠한 비판도 피해갈 수 있으며, 영화 속에 숨겨진 코드들을 읽어내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그 어떤 것도 과잉 해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물론 커뮤니티를 통해 성실히 모으고 정리된 코드들을 보면 과잉 해석이라고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마련된 역사 놀이판 같다. 어렵고 엄숙하고 무거운 것을 파훼하는 놀이. 여기에 감정적인 공감이나 분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오컬트는 장르를 작동시키는 약속이자,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진단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할리우드의 쿨한 피를 이식한 채 한국이라는 기이한 시공간에 불시착한 것 같은 주인공들은 이러한 놀이 방식에 적합한 태도를 보여준다. 허깨비를 물리치기 위해 기꺼이 허깨비가 되기로 한 표면의 어벤저스는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다만 걸신 들린 것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는다.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사진 속에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찍혔을지 궁금하다. 그 속에 어떤 비밀이 찍혀 있을 것만 같지만, 영화는 끝내 촬영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