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있어선 안될 존재를 직시하는, 알려지지 못할 싸움에 대하여, <파묘>
2024-03-20
글 : 김신

돌려 말할 필요 없이 <파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화두는, 오니의 출현을 기점으로 서사가 급격하게 굴절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측은 이 비약을 용인하지 못하며, 호의적인 측은 이 비약을 납득시키는 감독의 과단성에 매혹된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지만, 비평이란 예술가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긍정하는 대신 작품의 구체적 효과가 그 의도를 정당하게 납득시키는가를 논하는 작업이므로 감독의 뚝심이 기특하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파묘>의 도발적인 전략이 지니는 시의성을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잠시 우회해 그 전략을 시의성 있게 만드는 동시대 픽션의 상황을 간략하게 점검해보자.

앙드레 바쟁은 새로운 매체와 예술이 부상하면, 그것이 기존의 예술과 상호 간섭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가령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냉엄한 문체가 카메라를 연상하는 비인간적인 객관주의를 체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은 개별 작품의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특정한 스타일이라기보다 픽션의 경계를 결정짓는 감각 자체의 근본적 변화다. 기존 작품의 콘텍스트를 자의적으로 연장하는 시퀄, 실시간 송출과 임의적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 서사적 감각을 형해화했고 그 기류는 개별 작품의 윤곽에도 반영된다. 가령 근래의 여러 영화는 ‘이쯤에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미묘한 위화감을 종종 선사하며, 히어로 프랜차이즈나 <원펀맨> 같은 작품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비중을 지닌 캐릭터나 에피소드가 균질적인 의미의 총체와 무관하게 열거되고 증발하는 현상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허리가 끊겨 양분된”(이동진 평론가) <파묘> 또한 그런 무장소성에 지배된 요령부득의 결과물일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동시대 작품이 시공간과 역사적 인식의 파열을 징후로 드러낸다면, 거듭해서 묘표를 발굴하며 비약하는 <파묘>의 전략은 구체적인 지리학적 좌표를 지목하며 역사적 인식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그 징후를 타개하는 효과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전략은 상술한 동시대의 혼란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낸 서사적 배경 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가령 논란이 된 도깨비불 장면을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이 장면은 공포감보다는 서사가 급진적으로 도약한다는 황망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런데 막상 그 황망함이 극 중 화림(김고은)의 입을 통해 적시되고 있다는 점은 잘 말해지지 않았다. 화림은 도깨비불을 본 직후 관객이 느낀 이질감을 고스란히 진술한다. “이것은 혼령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있어선 안될 정령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있어선 안될 것 같지만 엄연히 잔존하는 유령. 그 유령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서 각각 세월호 참사와 여아 살해라는 근현대사의 폭력적 맥락을 새겨넣은 바 있는 장재현의 목표다. 그에게 비가시화된 영령을 소재화하는 기획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믿음을 실험하는 오컬트의 장르적 조건과 접속한다. <검은 사제들>의 최 부제(강동원)와 <사바하>의 나한(박정민)처럼, 장재현의 모든 작품에는 눈앞의 초월적 실체를 믿지 못해 시험에 처하는 인물이 나온다. 땅에 파묻힌 채 잔존하는 식민지의 맥락을 환기하는 <파묘> 또한 흡사한 기획을 고수한다. 이 기획의 비약적 전략이 느닷없긴 해도 허무맹랑하지 않은 이유는, 백욱인의 말처럼 한국이 식민지 봉건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얼렁뚱땅 근대로 진입했던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 간직한 국가이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그냥 지나가다 보이는 물건 같은 게 아닌 이상 억지를 써서 드러내는 묘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파묘>는 역사적 얼룩이 현대의 일상에서 은폐되거나 흔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을 곳곳에 암시해두었다. 물론 그런 얼룩을 기입하는 전략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얼룩이 아트하우스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현학적 형식으로 구현된 대신, 캐릭터의 언행과 정체성 안에서 유머러스하게 충돌하는 기호의 조합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친일파 조부의 유산으로 미국에 회사를 세운 회장의 어머니는 TV를 보며 탱고를 추고, 아기 무당은 희생물이 될 닭이 걱정되면서도 교촌치킨이 먹고 싶다. 오니를 퇴치하는 전문가들 또한 마찬가지라서, MZ세대 무당은 컨버스 신고 작두를 타고, 민족적 소명을 지닌 풍수사의 딸은 우주 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인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들이 오니의 존재를 발견해봤자, 언론과 관료는 애꿎은 반달가슴곰만 질책한다. 이 영화에서 상덕(최민식)의 번호판이 국가기념일 날짜라는 식의 유치한 이스터에그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비평을 숨은그림찾기로 오해하는 처사겠지만,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그런 얼룩이, 화림을 일본인으로 오해하는 승무원의 말처럼 가려지거나 중층화된 역사의 인상을 은밀하게 조성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장재현은 그 인상이 텍스트의 의미와 형식에 직접적 영향을 행사하게 만드는 대신, 행성의 궤도를 공전하는 위성처럼 내밀한 연관성을 지닌 독자적 요소들의 배치로 제시한다. 질베르토 페레즈는 공산당원 연인과 연애하며 사회적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을 키우던 시절의 장 르누아르가 스크린 안팎의 공간을 통합하며 고전기 영화의 공간을 “사회화”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비틀어 작금의 탈역사적 조건이 <파묘> 속 시공간과 인물의 분열적 개성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파묘>가 잊힌 역사를 피해자의 서사로 은유하는 대신, 공동체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액션영화의 화법을 채택한 선택의 매혹은 이미 많이 말해졌다. 나는 애국적 동기를 끌어들이는 그 전문가적 액션이 국수주의와는 구별된다는 점을 부연하고자 한다. <파묘>에서 상덕의 애국적 발언은 뜬금없긴 하지만 그 발언을 토대로 영화가 국가주의를 표방한다고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떤 작품이 ‘국뽕’의 뉘앙스를 띤다면 그건 단순히 개별 인물이 민족주의적 이념을 발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발언이 공동체를 집합적으로 호명하는 서사적 허위로 남용되기 때문이다. <파묘>는 그 허위적 기획의 불가능성을 곳곳에 새겨두었다. 상덕의 애국적 동기는 “밝은 곳에 있는 게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도입부에서 화림의 독백)과 격리된 특수한 전문가 집단의 대화, 혹은 독백체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만 들려온다. 그 음성이 말해지는 장소 또한 곰이나 좇으며 헛발질하는 정부 관료가 외면한 첩첩산중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공중파의 국가주의적 방송이 전 국민을 통합하는 음성으로 송출됐던 <더 문> 같은 유형과 거리를 둔다.

명백히 잔존하는 역사에 관한 교전이 현대에 발생했지만, 그 시대착오적 교전은 공동체에 알려지지 못한다. 화림의 말처럼 밝은 곳에 있는 게 전부라고 믿는 이들이 다수이기 마련이며, 우린 그걸 믿든 안 믿든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생색내지 않고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오니와 싸우며 생긴 트라우마를 숨기고 작두를 줍는 무당처럼, 상처에서 비어져 나온 혈흔을 옷깃 사이로 숨기며 현대의 공사 현장을 떠도는 지관처럼, 그리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어놓고 본인은 직관적인 오락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거짓말하는 한 영화감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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